사과라는 문장, 그 너머의 진실
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 서류 뭉치 속에서 '다문화 가정'이라는 분류는 지원을 위한 이정표입니다. 하지만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 이정표는 종종 서로를 가로막는 투명한 유리벽으로 변합니다. 특히 한국인 학생보다 외국인 학생이 더 많아 한국어 예비반이 따로 두 학급이나 운영되던 어느 학교의 풍경은, 우리가 알던 '교실 내 공존'의 문법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학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수자 배려'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곳이었습니다. 전교생 중 외국인 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이었고, 한국어가 서툰 아이들을 위한 '한국어반'이 별도로 두 반이나 운영될 정도였으니까요. 이곳에서 '다문화'는 더 이상 특별한 배려를 받는 소수의 정체성이 아니라, 학교의 일상을 규정하는 지배적인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숫자의 우세가 갈등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권에서 온 아이들이 한데 섞이면서, 교실은 매일매일이 소리 없는 문화적 영토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주무관으로서 제가 마주한 사안 조사서 속에는, 한국어라는 공통의 언어가 충분히 자리를 잡기 전 아이들이 내뱉는 거친 신체 언어와 오해의 파편들이 가득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언어폭력'이나 '신체폭력'으로 분류되지만, 그 이면에는 소통의 부재가 낳은 깊은 골이 패어 있었습니다.
학교폭력 사안을 조사하다 보면, 가해 측과 피해 측이 '폭력'을 정의하는 기준 자체가 문화권마다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아이들끼리의 거친 장난이나 가벼운 신체 접촉을 '성장 과정의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왜 한국 학교는 이걸 범죄자 취급하며 조사하나요?"
상담실에서 만난 외국인 학부모님의 항의는 당혹스러웠습니다. 한국의 엄격한 학교폭력 매뉴얼과 사법화된 절차가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이해할 수 없는 통제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국인 학부모들은 다수 학생의 거친 행동을 보며 "가정교육이 부실하다"는 식의 선입견을 투영하여 갈등을 키웁니다. 행정이 정한 '폭력'의 정의가 각기 다른 문화적 필터를 거치며 전혀 다른 색깔로 변색되는 지점, 그것이 이 학교가 매일 마주하는 행정의 미로였습니다.
이토록 복잡한 갈등 현장에서 제가 목격한 민원의 모습은 세련된 서류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인 아버지들이 직접 학교와 교육청으로 달려와 쏟아내는 거친 '요구'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사안의 중심에 서 있던 학생은 겉보기에는 전혀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말도 유창했고 외모도 예쁘장해서 누가 봐도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죠.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예민한 시기, 가해추정학생들이 아이의 배경을 은밀하게 비하하고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폭발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이미 한국어반 운영과 다양한 다문화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었음에도, 아버님은 그 보호의 성벽을 자꾸만 더 높이 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다문화 학교라면서 교육도 하고 다 한다더니, 왜 우리 애 관리는 이것밖에 안 됩니까?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써서 이런 비하 발언조차 나오지 않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교무실을 휘젓고 교육청 복도까지 찾아와 고성을 지르는 아버지의 분노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내 아이를 완벽하게 격리하고 지켜야 한다는 강박적인 절박함이 깔려 있었습니다. 학교의 노력을 인정하기보다 "왜 더 안 하느냐"고 몰아붙이며 학폭 신고까지 밀어붙이는 그 거친 항의 앞에서, 실무자들은 때로 '어찌 보면 참 너무하다'는 서글픈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결국 유리벽 너머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가장 원초적인 호소였음을,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문화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특별반을 운영할 때,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물리적 시설이 아닌 '마음의 중재'입니다. 사법화된 시스템이 견고해질수록, 문화적 배경이 다른 부모들은 더욱 방어적으로 변하거나 혹은 더 과도한 보호를 요구하며 시스템과 충돌하게 됩니다.
사과는 문화를 초월한 인류 공통의 문장이지만, 그 사과에 이르는 길은 문화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심의장에서 가이드북의 조항을 들이밀기 전에, 그들이 가진 삶의 궤적과 부모가 느끼는 불안의 크기가 한국의 학교 시스템과 어떻게 부딪히고 있는지 먼저 들여다보는 세심함이 필요합니다.
이름표를 떼어내고 오직 그 아이와 부모의 고유한 서사와 마주할 때, '다문화'라는 유리벽은 비로소 투명하게 허물어집니다. 서류 뭉치 속의 행정적 분류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아이의 성장을 바라는 '어른'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서로의 한계와 노력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나를 향한 물음]
나는 상대 부모의 서툰 한국어 뒤에 숨겨진 '자식을 향한 절박한 마음'을 읽어내려 노력했나요?
"더 해달라"는 아버지의 고함 뒤에 숨겨진 '내 가족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우리는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행정의 절차가 누군가에게는 '보호'인 동시에 '또 다른 요구의 명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점검해 보았나요?
본 도서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전문적인 법률적 조언이나 심리 치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