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고유한 '주기'를 산다
새벽 매트 위에 앉아 있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수많은 것들—호흡, 맥박, 잡념, 통증, 어제 일에 대한 잔상—은 과연 무엇에 의해 ‘나’로 묶이고 있는가. 묶여 있지 않다면 나는 분명 여러 조각일 텐데, 그 조각들은 어떻게 하나의 이름 아래 놓이는가. 이 질문을 조금만 밀고 들어가면 수련이 무엇인가, 라는 오래된 물음과 만난다.
수련을 정의하는 방식은 많다. 몸을 훈련하는 일, 마음을 단련하는 일, 자기를 도야하는 일, 해탈을 준비하는 일. 모두 틀리지 않지만 어딘가 바깥에서 수련을 바라보는 언어처럼 느껴진다. 다른 출발점에서 한번 수련을 바라보고 싶다. 모든 존재는 치우침이라는 자리에서.
치우침이란 평형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여기서 치우침은 편향이나 편벽이라는 일상어의 부정적 뉘앙스와 무관하다. 그것은 단지 한쪽으로 기울어 있음, 평평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잔잔한 수면에서 한쪽이 솟아오른 상태, 그것이 하나의 치우침이다. 별도 태풍도 세포도 인간도, 평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형태를 가진다. 이탈 없이는 형태가 없고, 형태 없이는 존재가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평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기운다는 것은 언제나 반대편을 전제한다. 한쪽이 솟아오르려면 다른 쪽이 가라앉아야 한다. 치우침은 자기 안에 반대편을 품은 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구조 때문에 치우침은 스스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기울어진 것은 언젠가 무너진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것도 이와 멀지 않다. 모든 질서는 평형을 향해 풀려간다.
유한성은 치우침의 약점이 아니라 치우침이 치우침이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유한한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태풍은 며칠을 살고, 세포는 몇 주를 살고, 인간은 수십 년을 산다. 별은 수십억 년을 산다. 이 ‘얼마만큼 지속하는가’가 곧 그 치우침의 주기다. 주기는 치우침 바깥에서 주어진 속성이 아니라, 유한한 치우침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나의 치우침은 단일한 중심을 갖지 않는다. 그 안에는 수많은 작은 치우침들이 포개져 있고, 각각 고유한 주기를 갖는다. 인간이라는 치우침 안에도 세포의 주기, 호흡의 주기, 감정의 주기, 사고의 주기가 층층이 겹쳐 있다. 그런데 이 여러 주기들이 ‘하나의 나’로 묶이는 일이 일어난다. 묶임은 별도의 기능이 아니다. 가장 안정적으로 구조화된 기울기를 가진 중심이 짧은 주기들을 자신의 시간 안에 포함하는 흐름이다.
이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태풍의 눈이 이동하듯, 인간이라는 치우침의 중심도 시시각각 이동한다. 어떤 순간에는 감각이, 어떤 순간에는 사고가, 어떤 순간에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이 묶음의 중심이 된다. 중심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개체의 주기—즉 깊이와 시간—가 달라진다. 같은 몸을 가지고도 어떤 날의 나는 짧은 시간 척도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고, 어떤 날의 나는 훨씬 긴 시간 안에 걸쳐 있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날의 일들이 아니라 중심의 자리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개체에게는 저마다 본래의 주기가 있다. 이 본래 주기는 어떤 보편적 본성에서 개체에게로 내려온 것이 아니다. 개체가 이 세계에 발생하는 바로 그 과정이 개체의 주기를 함께 규정한다. 태풍이 형성될 때 바다의 온도, 대기압의 분포, 지구의 자전 같은 수많은 조건의 얽힘이 그 태풍의 규모와 지속 시간을 함께 만들어내듯이, 인간 역시 태어나는 과정 자체가 자기 고유의 주기를 함께 만든다. 어떤 기울기로 이 세계에 발생했는가—그것이 곧 그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자기 자신일 수 있는가를 이룬다. 이 주기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본래 주기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일어난다. 생애 동안 개체는 수많은 짧은 자극들—즉각적 반응, 반복되는 염려, 사소한 욕구의 파동—에 노출된다. 이 짧은 자극들이 반복되면서 다중 중심 구조의 활성화 초점이 짧은 주기 쪽으로 끌려간다. 본래의 긴 주기 중심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가려진 것이다. 배경으로 밀려난 것이다.
여기서 수련을 다시 정의해 볼 수 있다. 수련이란 개체의 본래 주기를 회복하는 일이다. 새로운 주기를 만드는 일도 아니고, 주기를 연장하는 일도 아니다. 이미 자기 안에 있되 가려져 있던 본래 중심으로 활성화 초점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래서 수련은 근본적으로 ‘더함’이 아니라 ‘덜어냄’에 가깝다. 짧은 주기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본래 중심을 덮어쓰지 않도록 활성화의 자리를 옮기는 일. 그렇게 본래 중심으로 초점이 돌아갔을 때, 짧은 주기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중심의 긴 시간 안으로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개체는 그때 깊어진다. 깊어진다는 것은 어딘가로 가라앉는 일이 아니다. 자기의 본래 주기가 다시 자기를 이끄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이런 정의는 동양의 오랜 수행 전통과 공명한다. 노자의 반박귀진(反樸歸眞), 선불교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요가 전통의 카이발리아는 모두 ‘본래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구조를 공유한다. 이들 전통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수행이 새로운 무엇을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던 본래를 덮고 있던 것을 덜어내는 일이라는 점이다. 노자가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일이다(為道日損)“라고 한 것도 같은 자리의 통찰이다. 다만 이 전통들이 ‘본래’를 모든 존재에 공통된 보편적 본성(도·불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림에서는 ‘본래’가 개체마다 다르다. 각자를 이 세계에 내놓은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련이 향하는 자리는 어떤 보편적 일자가 아니라, 이 고유한 내 주기다.
이 정의는 수련을 ‘의지로 자기를 지배하는 일’이나 ‘어떤 특별한 상태를 획득하는 일’로 보는 관점과도 다르다. 지배의 언어로 수련을 말하면 수련자는 자기 안의 짧은 파동들을 적으로 두게 된다. 획득의 언어로 말하면 수련의 끝에 어떤 상태가 상품처럼 놓이게 된다. 그러나 위의 그림에서 수련은 지배도 획득도 아니다. 짧은 주기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본래 중심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포섭되어 가는 흐름이다. 도달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흐름 그 자체다.
새벽 매트 위의 물음으로 돌아온다. 나는 치우침이다. 치우침이 나의 존재이고 나의 시간이고 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수련이 목적으로 삼는 일도 아니다. 수련은 내 안에 포개져 있는 수많은 치우침들 중 어느 것이 나를 이끄는가에 관한 일이다. 짧은 주기의 치우침들이 의식의 활성화 초점을 매 순간 끌어당길 때, 그 자리를 본래의 긴 치우침에 다시 내어주는 일. 매일 매트 위에서 긴 시간의 흐름에 나를 다시 맡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