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2

오래 전 이야기

by 천지

2. 논현동


가게로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 매일 서해가 괴이한 형태로 꿈에 나왔다. 서해는 몸을 한껏 구기고는 바닥을 기어다녔다. 허물을 벗는 뱀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찾는 것도 같았다. 방을 배회하는 서해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소음이 났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기 전에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졌고. 오래된 손님이 지명하는 날에만 밖으로 나갔다. 양주를 마시며 꽁술이라고 기뻐했다. 방을 여섯 시까지 연장해 달라 외쳤고. 뇌에 알코올이 부식되는 느낌이 들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날 꿈에서는 서해의 동생을 보았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서해의 동생임은 자명했다. 움직임은 서해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서해의 얼굴을 뜯어 가려고 했다. 서해를 향해 마구잡이로 손을 뻗어대는 것을 저지하려던 차였다. 그것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것은 바닥까지 물이 흐를 만큼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와 똑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내 얼굴이다. 인지한 순간 숨이 벅차게 차올랐다. 볼에 열감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뜯어 갔을 것이다. 분명히 피투성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서해가 아니라 나를! 얼굴을 바삐 더듬거리다 잠에서 깼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목이 탔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밖에서 소주를 마시자는 명분으로 서해를 불렀다. 이내 안도했다. 꿈에서와는 달리 서해는 생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서해 역시 논현동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남자 친구가 있냐는 물음에는 부끄러워했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을 때는 히죽거리면서 웃었다. 인터넷에서 본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식욕과 성욕이 강한 인간을 귀신이 더러워한다고 했던가. 나는 잠들 때까지 야한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 여파로 미묘한 꿈을 꿨다. 서해가 꿈에 나오기는 했으나 괴기한 모습은 아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서해였고. 입술을 맞댔다. 서해의 냄새가 났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서해는 물을 머금고 돌아왔는데. 그 물 안에는 쌀알이 들어 있었다. 내가 뱉어 내자 흙으로 바뀌었다. 악몽은 아니었기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현실처럼 생경한 꿈이었다.


그날 밤 다시 술을 마시자는 서해의 연락에 응했고. 그가 꿈에서처럼 키스해 줬을 때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앞에 있는 이것이 서해가 아니라는 것을.



3. 철원군 상사리


계속되는 악몽에 초췌해졌다. 수척한 몰골에 초이스도 되지 않았다. 택시비 오만 원만 받고 퇴근하기를 몇 번째.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가끔 서해가 집으로 찾아오고는 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열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몸을 지배했고. 잠자코 칩거 생활을 이어 나갔다. 꿈에서는 서해가 다시 기어다녔다. 문 바깥에서는 환청이 들린다.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문 앞의 쌀 한 포대를 발견해서야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감각이 선명해졌다. 문득 떠오른 것은 서해의 동생이 받았던 점사다. 그것이 물을 건너면 안 된다는 예언을 기점으로. 어디서 본 듯한 미신들을 마구 수집해 나갔다. 한국의 혼은 일본을 건너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전에 그런 글을 본 것 같았다. 반드시 해외로 가야 하는 것인가 싶었고. 백이 훌쩍 넘어가는 논현동의 월세와 바카라에 날린 돈에 골치가 아팠다. 만일 일본으로 간다면 어떻게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일본어를 하지도 못하는데. 현실과 극심한 공포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차. 전화 벨이 울렸다. 금옥이었다. 거진 십 년 만이었다.



4. 철원군 한탄강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금옥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꺼운 안도감이 혈류를 타고 순환하는 것 같았다. 금옥이 나를 찾는 것은 운명이 나를 배반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단서였다. 확신했다. 살았다! 그 명징한 목소리가 나를 살려 주고 있다!


금옥은 아직 철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이 먹으니 신발이 떨어져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나를 철원으로 데리고 오려는 열연이 펼쳐졌다. 심심하다는 명분이었다.


금옥신당. 철원군 동송읍. 한탄강을 볼 수 있는 물윗길과 삼십 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한탄강은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른다. 평강의 산지에서 시작해 남한의 철원으로. 금옥의 뜻은 명쾌했다.


고석정의 반대 방향의 물윗길에서 만나자. 걔가 한양에 묶여 있어. 해외로 못 나가.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 사라진 것이라. 한탄강으로 오기 전에 주저할 거야.


북한이 외국일까 봐 못 따라오는 귀신이 있다고? 뭐 그딴 게 다 있나.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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