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이올린 이수민 Apr 21. 2020

“귀족은 수천 명이지만 베토벤은 한 명 뿐입니다"

청년 베토벤의 전성기

얄팍한 쾌락의 도시


베토벤이 22살 때부터 평생을 살았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잠깐 살펴볼까요. 빈은 당시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신성로마제국의 핵심이었던 함부르크 왕가의 입김이 센 곳이었습니다.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던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의 분위기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시민이 주가 되어 계몽주의의 흐름이 거세지거나상부의 감시와 핍박이 심해지거나



프랑스 혁명을 묘사한 그림들



오스트리아는 경찰국가였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각 계층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놓아 정치적인 움직임을 항상 감시했죠. 그렇기에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무엇을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얄팍한 쾌락에 몰두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두고오늘을 즐기자라는 마음가짐이었죠. 


빈 곳곳에 지어진 무도회장은 매일 꽉꽉 들어찼고 온갖 유흥거리, 도박, 서커스, 매춘 등이 횡행했습니다. 유럽에서 왈츠를 제일 사랑하는 도시라는 빈의 별명은 이러한 배경 때문에 생긴 것이죠. 




부자 관계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 2세. 빈 스타일 왈츠음악을 완성시켰다.



요즘도 중요한 국제적, 정치적 이슈를 덮기 위해 연예인 찌라시를 퍼트리는 것처럼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는데는 예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녁 시간, 시민들의 관심을 흩어놓기에 적합한 곳은 극장 밖에 없다’라고 나라에서도 공식적으로 문화예술을 장려했습니다. 








20대에 찾아온 전성기


자신의 재능과 실력에 확신을 가졌던 베토벤은 22세에 독일의 작은 도시 본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하자마자 귀족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피아노 실력은 물론이고 즉흥연주를 빈에서 제일 잘하는 피아니스트로요. 귀족들은 평민 신분이었던 베토벤을 친구처럼, 가족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귀족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고 살 곳, 최신 악기 선물, 연금 등으로 베토벤의 마음을 사기도 했죠. 매질하던 아버지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밑에서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베토벤은 드디어 소속감과 안락함을 얻게 됩니다.      



신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게 더 가까이 있다.


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누구든 온갖 불행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



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베토벤. 자뻑에 이유가 있었네~!




귀족 사회에 무사히 입성한 베토벤은 많은 수입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되어 어렵게 살아야 했던 날들의 기억 때문에, 들쑥날쑥한 수입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한창 전성기를 맞았던 20대 베토벤의 주 수입원은 귀족들의 후원금과 연금, 출판된 악보 판매, 피아노 렛슨, 대중 연주 수익이었습니다. 


특히 현악사중주 장르가 특히 빈에서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Op.18>가 전유럽에 걸쳐 대히트를 치면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고, 출판사에게는 흥행 보증수표가 되어 이후 작품들은 부르는게 값이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대중 연주 포스터(1800년)와 현악사중주 구성










귀족들과 돈독한 형재애를 나누던 시기는 잠시였고, 베토벤은 곧 불만을 갖게 됩니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억압적인 오스트리아의 정치 구조귀족들에게 돈과 혜택을 받는 대신 그들에게 굽신거려야하는 전시대적인 예술자/후원자 관계에 대해 말이죠. 


베토벤은 핏줄을 잘 타고났을 뿐인데 부귀영화를 누리며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의 특권의식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그들 앞에서 대놓고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매사에 불만이 많고 괴짜스러운 모습까지도 ‘베토벤스럽다, 역시 천재는 다르다’며 이해해주었습니다. 



운 좋게 핏줄을 타고난 귀족은 수천 명이지만 베토벤은 한 명뿐이다.

-베토벤




30대가 되자 베토벤 공연의 횟수는 그 때까지 열렸던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공연을 합친 횟수보다 많아지게 됩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시대를 잘 타고난 것이죠. 당시 빈에는 전업 피아니스트가 300명이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도 6000명 가량으로 피아노라는 악기가 교양 시민이라면 꼭 갖고있어야 하는 것, 칠 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죠. 


이러한 흐름을 타고 피아노도 개량됩니다.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은 당연히 피아노를 협찬받습니다. 요즘 인스타그램 셀럽들이 현물 협찬을 받는 것처럼요.



영국의 피아노 제작자 Broadwood가 베토벤에게 선물했던 피아노. 개량되어 커진 음량을 좋아했다고 한다.








붉은 피부에 마마 자국이 있는 못생긴 얼굴...


베토벤은 자존감이 무척 높았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귀족 사회의 인정이 그 원인이 되었죠. 베토벤의 외모는 어땠을까요? 가장 유명한 초상화를 한 번 볼까요. 


울긋불긋한 얼굴에 다크써클, 사방으로 뻗쳤지만 카리스마 있는 은발, 눈을 치켜뜨느라 이마에는 주름이 조금 져 있고요. 단단한 하관은 남성미까지 풍깁니다. 한껏 세워진 새하얀 셔츠의 깃, 아무렇게나 맨 새빨간 스카프, 주름 하나 없는 두툼한 남색 외투를 보아하니 차림새도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베토벤의 초상화




당시 베토벤을 가까이서 지켜본 귀족 부인의 기록입니다.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 붉은 피부에 마마자국이 있는 못생긴 얼굴, 머리칼은 단정치 못하게 늘어져있었다. 옷은 너무 평범했고, 발음에는 사투리가 심했고 세련되지 못했다. 행동거지는 무례했고 거만하기까지 했다.”




곡의 영감을 위해 매일 산책을 나섰던 베토벤. 키가 162cm 였다.








여기서 질문베토벤은 왜 유명한걸까?


서양음악은 베토벤 전후로 나뉩니다. 

음악 스타일도 그렇고 시대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 작품에 담긴 철학까지도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왕족과 귀족에게 고용된 하인 중 한 명, 미천한 악사 -> 프리랜서 음악가


2)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 -> 감정의 즉흥성, 충동과 관능에 집중했던 낭만주의


3) 왕족과 귀족들의 여흥에 쓰일 작품을 주문받아 제작 -> 작품에 작곡가 개인의 개성과 내면을 담아냄


곡의 수준도 베토벤 대에 와서 매우 높아집니다. 베토벤 이전 ~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까지는 아마추어가 초견으로 연주를 하기도 쉬웠고, 한 번 듣고도 이해가 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프로 연주자도 연습으로 갈고 닦아야 했고, 감상자도 곡을 몇 번씩 듣고 곱씹어야 이해가 되었죠.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 돈 많은 시민층, 부르주아 계층이 대두되면서 그들의 유흥을 위한 대규모 대중 공연이 많아집니다. 그런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프로 연주자 역시 많아졌고, 점점 자극적인 것을 찾는 대중들의 만족을 위해 곡의 난이도도 높아져야 했죠. 그리하여 전에 없던 기교와 무대 매너를 선보이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같은 스타 연주자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종종 사람이 아닌 악마로 묘사되는 파가니니








그가 다른 음악가들과 다른 이유를 정리하자면


1) 음악가, 더 나아가 예술가의 역할과 인식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2)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던 베토벤은 선대의 음악적 유산, 전통을 필요할 때만 참고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삼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죠.  


3) 현악 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콘체르토(협주곡), 심포니(관현악곡) 등 작곡을 시도했던 모든 장르의 형식과 구성면에서 완벽한 모범 답안을 내어놓습니다.


4) 본인 스스로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에 죽기 전 4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피아노 작품을 씁니다. 88개 건반을 가진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으로 보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였죠. 이는 베토벤이 사망하고 난 뒤 리스트, 브람스 등 후배 작곡가들이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을 작곡하는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5) 완벽주의 성격을 갖고 있던 베토벤이기에 작곡한 모든 곡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작곡을 완성해놓고 곡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했던 경우에는 그냥 묻어놓거나 작품번호를 붙이지 않고 출판했습니다. 1955년, 두 명의 음악학자들이 이런 작품들에 WoO(Werks ohne Opuszahl = Works Without Opus Number)라는 기호를 붙여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클릭) 엘리제를 위하여> 역시 베토벤이 작품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기에 WoO.59라는 번호를 달고 있습니다. 



베토벤에게 큰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리스트와 브람스









모두의 영웅에서 독재자로


프랑스는 1805년, 1809년 두 차례 빈을 침공합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숙적이 되었고, 빈 시민들도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주보다 프랑스를 더 싫어하게 됩니다.


여기서 베토벤은 독특한 입장을 가집니다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같이 야망과 카리스마를 가진 자영웅을 찬양했죠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자신의 서재에 나폴레옹의 흉상을 둘 정도로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스타이자 영웅이었습니다. 


자신의 전속 화가 장 자크-루이 다비드에게 허구가 곁들여진 대관식 장면을 그리게 한 나폴레옹




베토벤은 한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심포니 3번>을 헌정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전 유럽을 제패하고 난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나폴레옹의 모습에 실망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적어놓은 표지를 박박 찢어버리고 <영웅 Eroica>이라고 고치죠. 


그리고는 결심합니다. 나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영웅이 되겠다고. 가벼운 유흥과 쾌락을 위한 음악이 아닌, 역사에 길이 남아 후대에게까지 울림을 주는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음악은 우리를 흥분시켜 새로운 창조를 부추기는 포도주다.

나는 이 영광스러운 포도주를 인류를 위해 짜내고 

그들의 정신이 취하도록 하는 바쿠스다. 

-베토벤




나폴레옹 이름을 박박 지워 구멍이 난 <심포니 3번> 악보 표지







3편에서는 베토벤의 실패한 사랑들, 슬럼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토벤과 천재의 3가지 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