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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린 이수민 May 01. 2020

베토벤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까?

베토벤의 여인들과 슬럼프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으세요?


완벽주의 작곡가의 하루일과는 어땠을까?
베토벤 말년에는 귀가 완전히 멀었다는데 그럼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했을까?
베토벤은 결혼을 했을까? 후손이 남아있을까?
20대에 이미 전 유럽에 이름을 떨쳤던 베토벤도 슬럼프가 있었을까?


궁금하시죠? 아래에서 하나씩 알려드릴게요!     


1일 1와인 했던 베토벤은 평생 간 건강이 안좋았다.



<베토벤을 통해 보는 천재의 3요소> 1편 복습 https://brunch.co.kr/@connectart/48 


<20대 청년 베토벤의 전성기> 2편 복습 https://brunch.co.kr/@connectart/49               








슬럼프의 원인들


1. 사랑

베토벤은 결혼을 통한 안정, 진실한 배우자를 무척 원했으나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매번 실패했습니다. 대개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 나이, 상황의 여성들을 사랑하거나 일방적인 짝사랑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건강

20대 후반부터 청력에 이상이 생겨 40대에는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귓병 외에도 만성 복통, 잦은 음주로 인한 간 질환, 두통에 항상 시달렸죠. 심신의 고통이 너무 크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32세에는 유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3. 귀족 후원자들의 몰락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유럽 전반의 시대적 분위기가 바뀌면서 베토벤을 후원해주던 귀족들이 다른 도시로 이주하거나 몰락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계층, 돈 많은 상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르주아가 원하는 음악은 베토벤의 음악 스타일과는 달랐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적으로, 기교적으로 점점 더 어려운 난이도의 곡들을 썼던 반면 대중들은 한 번 듣고 이해가 잘 되는, 파가니니처럼 기교 과시형의 음악을 선호했죠.



4. 조카 카를

첫째 동생이 일찍 죽으면서 형 베토벤을 아들 카를의 후견인으로 지목합니다. 결국 독신으로 살며 자녀를 가지지 못했던 베토벤은 조카에게 집착하게 되고 형수와 법정 소송까지 벌이게 됩니다.   

조카 카를은 카를대로 스트레스를 받아 권총으로 자살시도까지 하죠.  이 사건이 없었다면 베토벤은 작곡 중이던 <교향곡 10번>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천재 작곡가에게는 너무 어려웠던 사랑


평민 신분이라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반영된 것일까요, 베토벤은 짧게 짧게 귀족 여성들과 연애를 하긴 했지만 결혼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신분제가 엄격하게 남아있던 시대였기 때문이죠. 베토벤 본인도 귀족과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처음으로 결혼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불행하게도 그녀는 나와 신분이 달라. 당연히 결혼을 할 수 없지. 그렇기에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네.”

-베토벤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사랑의 결과는 좋지 않았어도 사랑이라는 감정, 그 설레임은 창작의 연료가 되었습니다. 한창 사랑에 빠져있었던 1800~1801년에 그는 <교향곡 1번>, <현악사중주 Op.18>, <피아노 협주곡 3번>,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 <바이올린 소나타 Op.23, 24>, <피아노 소나타 Op.26, 27, 28> 등 대작들을 줄줄이 쏟아냈습니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 준 죄로 평생 간을 쪼아먹히는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이 중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는 유명한 궁정 발레 선생인 살바토레 비가노의 위촉으로 작곡되었습니다. 30세의 베토벤은 이전까지 무대 음악을 작곡한 경험이 없었기에 바가노처럼 유명한 사람이 베토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는 것에서 당시 베토벤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의 내용은 아담과 이브 + 그리스 신화 + 피그말리온 + 프로메테우스 + 오르페우스 신화 + 십자가 처형과 부활까지 온갖 이야기가 섞여 잡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연되자마자 인기가 매우 높았죠.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 트레일러 https://youtu.be/MqIStpvkOrY 








베토벤이 한참 창작열을 불태우던 시기 그의 사랑을 받고 있던 귀족 여성은 17세의 줄리에타 귀차르디로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치던 제자였죠. 당시 음악가가 귀족 자제에게 악기 렛슨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줄리에타에게 흠뻑 빠져있었고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헌정합니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베토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죠.

 “아주 못생겼고, 옷차림이 대개 허술하다.”

(음?? 상상연애였어??)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https://youtu.be/rlJHNufol8Q?t=19      




줄리에타 귀차르디와 그녀에게 헌정된 <피아노 소나타 14번> 표지







많은 귀족 여성들이 그로부터 작품을 헌정 받거나 투박하지만 열정적인 러브레터를 받았습니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바로 나 자신인 그대여.
그대는 나와 함께해야 하고 나는 그대와 함께해야 합니다.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꽉 차 있어요.
다른 누구도 내 마음을 절대로, 절대로 가질 수 없어요.
그대의 사랑은 나를 가장 행복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오늘, 어제, 눈물 속에서 그대를 갈망하는데... (중략)”


-1812년, 불멸의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발췌



수신자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이 편지는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부치지 못한 이 편지는 베토벤 사망 후 발견되었다.


베토벤 사후 비밀 서랍 속에서 발견된 초상화 중 하나. 어쩌면 이 여성이 불멸의 여인일 수도 있다.







줄리에타 귀차르디의 사촌이자 베토벤과 한때 약혼했던 사이인 테레제 말파티는 <피아노 소나타 24번 ‘ 테레제’>를 헌정 받죠.

피아노 입문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쳐봤을 법한 <엘리제를 위하여> 역시 그녀를 위해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사랑 줄리에타의 사촌 테레제 말파티. 베토벤이 37세 때 그녀와 약혼했으나 3년 후 파혼했다.


<엘리제를 위하여> 악보 원본. 베토벤이 워낙 악필이라 Therese라고 쓴 것을 출판사에서 Elise라고 잘못 읽고 제목으로 정했다는 소문이 있다.



테레지 말파티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24번 https://youtu.be/CfiiRZvTVeU 


바가텔 25번 ‘엘리제를 위하여’ https://youtu.be/FW_KCau2iTI               


 








오페라의 여주인공이 그의 이상형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항상 헌신적인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베토벤이 바라던 여성상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의 여주인공에게 투영되었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아내 ‘레오노레’는 남장을 하고 ‘피델리오’라는 이름으로 감옥 간수로 잠입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는 남편을 구하게 되죠.

충실하고 헌신적인 동반자. 이는 베토벤이 그토록 원하던 이상적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오페라는 1805년에 초연됩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죠.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해 황제 및 귀족들은 도피했고 도시 전반에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초연 당시 프랑스군 몇 명 만이 관객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곡의 길이, 작품성에 대한 혹평도 있어 8년에 걸쳐 개정, 최종 버전을 내어놓습니다.


 이후 많은 맥베스, 파우스트, 율리시스 등 그가 좋아했던 주제인 '영웅'을 다룬 대본들을 검토했지만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었습니다. 다양한 장르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들을 내어놓았던 베토벤이기에 그가 남긴 오페라가 한 곡 밖에 없다는 것이 참 아쉬운 일입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페라 <피델리오> 피날레 

https://youtu.be/wOZkyylH1V4           




억울하게 갇힌 남편을 위해 남장을 하고 감옥에 들어가 남편을 구하는 의리있는 부인 이야기







술, 담배, 진한 커피


베토벤은 아침에 일어나 정확히 원두 60알을 넣은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또 매일 한 병 이상의 와인을 마셨고, 단골 술집에 들러 큰 컵으로 맥주를 마시며 파이프를 피우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식사 시간에 초대하는 날에는 주량이 늘어났죠.


의사들과 주변 친구들이 건강에 대해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습관을 잘 바꾸지 않았습니다. 매우 약해진 간은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놔둬... 사람은 안 바뀌어...)



          

250달러에 팔고있는 베토벤 두상 조각 파이프



그는 매일 아침 정확히 원두 60개를 넣은 커피를 즐겼다. 표정이 예술이다.



베토벤의 커피를 다룬 일본 애니메이션 https://youtu.be/KoLq9NFHB-8 








32세에 쓴 유서


베토벤은 의사의 권유로 32세이던 1802년, 빈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납니다. 6개월이 지나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자 베토벤은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그리하여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유서 형식의 긴 편지를 남깁니다.


이 유서 역시 불멸의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마찬가지로 부쳐지지 않았고 베토벤 사후에 유품 속에서 발견됩니다.



“너희는 내가 심술궂고, 고집불통이며, 인색하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겠지. 너희는 나를 정말로 오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섯 해 동안 난 절망적인 고통을 겪어왔어. 몰지각한 의사들 때문에 고통이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있었는데도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에 속아왔지.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 ‘좀 더 크게 말씀해주세요. 귀가 먹었으니까요.’
나는 추방된 외톨이처럼 살아야 해. 난 정말로 사회와 어울릴 수가 없어.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면 불에 덴 듯한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고 나의 상태가 간파될까봐 겁에 질린다.
나를 붙잡아둔 건 오로지 나의 예술뿐이야. 나의 내면에 들어있는 것을 모두 꺼내놓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이 비참한 삶을 견뎌냈지.
아, 인간들이여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이 나를 부당하게 대했음을 알아주시오. 온갖 타고난 한계가 많았지만 그래도 가치있는 예술가이자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고... (중략)”     



두 동생들에게 심신의 고통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시작했던 편지. 이 편지는 삶에 대한 애정이 아직 남아 있음을,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붙들었음을, 이 고통을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끝맺습니다.



“내 운명은 참으로 가혹했지만 죽음이 늦게 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죽음이 오더라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이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테니까 말이지.
올 테면 오라! 나는 너를 용감하게 맞이할 것이다.”



하일리겐슈타트는 한적한 휴양 도시였고 온천이 유명했다. 오른쪽은 하일리겐슈타트 스파&게스트하우스 홍보 포스터




하일리겐슈타트에서 6개월 요양을 했는데도 병이 나아지지 않자 두 동생에게 썼던 유서



유서를 쓰기 불과 1년 전에 완성했던 밝은 분위기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https://youtu.be/PGFs7n6n3-8?t=64 









다음 편에는 귀족 후원들의 몰락, 조카 양육권을 두고 형수와 벌인 소송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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