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다락원의 <일본어 저널> 연재된 글을 각색했습니다.
출근길, 교대역에서 3호선에서 내려서 2호선으로 갈아탈 때즈음에는 휴대폰의 플레이리스트는 건스앤로지스의 ‘웰컴 투 더 정글’의 차례가 되었는데,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무사히 문이 닫힐 때 안도감과 함께 뜬구름 같은 희망사항을 마음에 품곤 했었다. 그것은 한번쯤은 이 정글 같은 애증의 도시, 서울을 떠나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사실 해외에 거주하는 일은 몇 번 시도하긴 했으나 현실의 벽 또는 안정적인 미래라는 달콤한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그저 이를 대신하는 여행을 떠나며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기회가, 아니 까맣게 잊고 있던 그런 바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흔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남편의 발령을 이유로 반쯤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이를 ‘반’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전히 그곳이 대도시이기 때문이다. 도쿄는 이전에 여행을 한 적은 있지만 살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건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마주하는 일이라서 부푼 마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바삭하게 구워진 공갈빵을 한입 베어물면 와자작 산산조각이 나듯이, 잘 부푼 내 마음도 와자작 부서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임시로 마련한 숙소에 머물며 집을 보러 다녔는데, 공항에서 연예인들이 타는 밴처럼 생긴 큰 MK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임시 숙소는 택시 기사님도 당황할 정도로 숙소가 있을 법하지 않은 어두운 골목에 있었다. 일단 임시숙소라는 곳이 우리나라로 치면 안방 크기의 공간에 침실, 부엌, 화장실, 욕실, 세탁실을 구겨 넣은 듯한 곳이라서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면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한 명이 움직이면 무조건 나머지 한 명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급히 일본으로 오느라고 수중에 들고 온 30만엔은 점점 줄어들어 불안한데 웨스턴유니온으로 보낸 돈을 찾으러갔더니 마이넘버가 없으면 돈을 찾을 수 없어서 궁핍한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식별번호가 2016년에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마이넘버였다.) 집을 구해서 주소를 등록하고 마이넘버를 받을 때까지 우리의 궁핍한 생활은 계속 되었다.
얼핏보면 서울과 닮은 도시라서 도교에서 산다는 것이 수월할 것 같지만, 여러 골치 아픈 문젯거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언어였다. 영어가 세계공용어라고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영어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혀보는 성격이라서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 홀로 은행에 갔는데 창구직원이 일본어를 하는 사람과 함께 오라고 계좌 개설 업무를 거절했다. 나는 2개월 동안 독학으로 공부한 모든 일본어를 동원해서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주위에 한 명도 없다며 ‘出来ます。わたしの日本語少し、あなたの英語少し、一緒に話しましょう!(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일본어 약간, 당신의 영어 약간, 함께 이야기해요!)’하고 직원을 설득해서 어찌어찌 계좌를 만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아는 일본어를 총동원해서 일본생활을 헤쳐 나갔는데 때로는 당황해서 ‘아리가또고자이마스’를 ‘아가리또고자이마스’라고 하기도 하고, 밥을 먹고 ‘오카에끼오네가이시마스(계산 부탁드립니다.)’를 ‘오카에리나사이(다녀오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본생활에 직업을 찾기 위해서였다. 운동을 다니면서 도쿄에서 일하는 외국인을 여럿 만났는데 모두 일본어가 유창해서 깜짝 놀랐다. 학원을 등록하고 레벨테스트를 거쳐 초급반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반에 배정되었는데 그곳에는 6개월 동안 일본어를 공부했던 여러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다. 일본어 학습에 있어서 한국인이라서 유리한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그에 대한 질투어린 시선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온 내 짝꿍은 매일 나의 쪽지 시험 결과를 보면서 미정상은 한국인이라서 매일 점수가 높다고 말하곤 했는데, 나도 처음에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그 말을 100번쯤 듣게 되니 모든 한국인의 노력이 폄하당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외워야 하는 단어와 표현이 많아져서 한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잘 할 수는 없다.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한국 학생들이 많아서 고급반으로 진학하는 사람의 비율 중 한국인의 비율이 높은 것 뿐이었다.
일본에서의 취업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날로부터 9개월 후 고급반으로 진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때 비로소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급반에서는 롤플레이를 하면서 상황에 맞는 대화를 이어갔는데,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피드백을 주셨다. 다소 직설적이고, 돌려서 말하는 식의 세련된 대화에 미숙한 단호박녀에게 일본식의 돌려말하기는 고급 일본어보다 더 어렵고,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숙제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어서 ‘日本語が下手ですから、。。。。。。(일본어를 못해서...)’로 대화를 시작하면 선생님은 바로 말을 끊고, 돌려서 말하는 식으로 ‘日本語がまだまだですから。。。。。。(일본어가 아직이라서...)’로 수정되었다. 짧은 시간에 문단을 외웠어야 하는데 시간 내에 외우지 못해서 ‘頭が良くないですから。(머리가 나빠서요.)’라고 말을 하면 선생님은 정말로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너무도 진지하게 쉬는 시간에 나를 따로 불러서 나의 머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일본어가 문제라는 위로의 말도 건네 주셨다. 일본어를 말하는 것과 상황에 맞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은 달랐다.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을수록 이대로 회사에 취업을 하면 내게 남은 것은 일본 사회에서 성인에게도 예외는 없다는 ‘이지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급반에서는 ⌜국화와 칼⌟에서 보던 혼네과 타테마에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특히 거절하는 상황에서 싫어서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はちょっと。。。’라고 말끝을 흐리는 것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처음 일본으로 왔을 때 거침없이 쏟아내던 일본어와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표현하기를 주저했고 일본사람과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워졌다. 한번은 일본사람에게 신세를 져서 식사 약속을 잡으려고 했는데 날짜를 지정해서 물었더니 ‘지금으로서는 괜찮은데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일정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이 거절의 표현인지 아니면 급한 회사일이 생길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말은 완곡한 거절의 의미였음을 훗날 알게 되었다. 아, 앞으로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 갑자기 '일본생활의 끝은 외로움만 남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출근시간의 전철은 일본생활의 작은 위로가 된다. 내가 살았던 다카다노바바에는 여러 노선의 전철과 지하철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자주 이용하는 야마노테선은 우리나라의 2호선처럼 도쿄를 순환하는 노선을 운행 중이다. 다카다노바바의 출근시간의 전철은 교대역의 그것을 꼭 닮아서 가끔 나는 ‘월컴 투 더 정글’을 들으며 묘한 ‘데자뷰’를 느끼곤 한다.
아무리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일본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야마노테선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정말 좋은데, 더 이상 탈 수 없을 것 같은 전철로 온힘을 다해 앞 사람을 밀고 또 밀며 객차 내로 들이치는 그들에게서 발가벗은 속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전철 가장자리 좌석에 설치되어 있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면 뒤에서 밀치는 힘 때문에 몸이 눌려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친절하기로 유명한 일본인의 출근시간도 교대역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친절함으로 무장한 그들의 타테마에도 출근시간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나는 인간의 마음이란 다 똑같다는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일본생활의 자신감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