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반대로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보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썼던 에세이집 <유명:幽明>의 한 구절이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게 되었는데 문장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 '너, 여전히 죽는 게 두렵잖아? 살아있는 이 순간들에 감사하고 있어?' 많은 이들의 '죽음'을 간호하며 비로소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나' 또한 죽는 존재임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죽음을 거쳐 바라보자던 내 '삶'의 관점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나의 마지막은, 여름>이 내게 주황 불을 깜빡인다. 한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의식적으로 이 책은 서행하게 된다. 150쪽짜리 루게릭병 환자인 안 베르의 마지막 기록이다. '뭐가 어찌 됐든, 나는 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정면을 바라본다.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 얼마 후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121쪽).' 글을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이 기록을 도저히 단숨에 읽어 내릴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내게 '죽음의 태도'를 묻게 되었다.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 죽음에 대해 취하는 입장이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답할 자신이 없어 덮은 책을 펼쳐 다시 읽는다. 재독 하며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죽음'을 숙고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선 무언가에 대한 '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처럼 '죽음'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글을 쓸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게 당연하다.
"어쨌거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 조건, 혹은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일 거다.
- 더요, 더요, 조금만 더요… 심지어 생의 가장자리에서 죽음을 계획하는 와중에도 나는 끝을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134쪽)." 나의 존재가 유한하다는 건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언제나처럼 살아있을 것만 같다. 말기암으로 임종하는 많은 환자 분들을 간호했지만, 일상을 살다 보면 나의 '죽음'은 까마득한 구름 밖의 일처럼 느껴진다. 머리로만 유한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죽는 순간에도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당연할 지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나만의 올곧은 태도를 갖고 싶다. 이는 곧 '삶'에 대한 올곧은 태도와도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어느 여름날, 죽기 전까지 살아있었다. 짧게 치는 문장, 문장에서 그녀의 '생'이 가지고 있는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늘 저녁, 대서양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저 음악가들의 젊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저들의 아름다운 음악 선율이 나를 답 없는 강박적 의문들로부터 해방시킨다(150쪽)." 비록 루게릭이라는 용암에 의해 육신이 잠식되어갔지만, 그녀는 음악가들의 열정 넘치는 연주를 보고 들으며 순간에 열중했다. '곧 죽을 사람'이지만 '죽은 것처럼' 살아있지 않았다. 지금의 바로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 몰입이 어느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강박적 의문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동녘을 보려고 맨발로 나가 이슬을 밟는다. 첫 햇살, 대지를 스치듯 밀고 가는 빛이 과수원에 비친다. 여기, 이 새벽의 고독 속에서, 나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잊는다(33쪽)."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죽음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것은 '몰입'이다.
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마지막이 여름이라 하더라도 가을과 겨울은 찾아온다. 그녀가 죽어도 라일락이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삶이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약 1년여 전에 떠나보낸, '어리'가 떠오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했던 아니,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존재이다. 어리는 잠시 머물렀던 이 생에서 그를 만났고, 한 치의 계산도 없는 마음을 주고받았으며 그의 가슴속에선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리가 떠난 날은 무더운 여름날의 어둑한 새벽이었고, 그 여름이 다시 가까이 오고 있다.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다.
홀로 지탱하기 힘든 몸을 내 다리에 기대고 있는 어리. 사진 속에 담긴 모습을 보면, 아직 살아있는 것만 같다. 어리에게서 느껴졌던 체온,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던 눈망울, 쌕쌕거리며 숨을 쉬던 그리고 영혼이 떠나고 난 모습까지 모든 게 생생하다. 어리는 삶의 끝자락에서 무얼 보고 무얼 느꼈을까. 무엇에 잠시나마 몰입했을까.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동해 바다 모래사장을 힘껏 뛰었던 순간에, 순식간에 밀려오는 파도에 흠뻑 젖었던 순간에, 어리도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죽음'의 운명을 잊었을까. 오롯이 그 순간에 살아있었을까.
사랑하는 존재가 생을 마감하더라도, 시계는 째깍째깍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나의 시계가 멈추더라도, 세상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각자 유한한 삶을 살고 있다. 시계가 멈추는 그 순간까지 나의 삶이라는 주도권을 잃고 싶지 않아, 오늘도 나는 죽음을 앞에 두고 써 내린 누군가의 눈을 빌려 '죽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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