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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Oct 10. 2022

숲에 들다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

며칠 내린 가을비로 창공의 푸른빛이 쨍하고 깨질 것만 같다. 주말 늦은 오후, 돗자리를 들고 어린이대공원을 찾았다. 수 년째 이 동네에 살면서 왜 여태 몰랐을까. 주말, 서울의 아이들은 모두 어린이대공원에 집결한다! 공원 안의 길은 모두 아이들의 점령지다. 아이들의 무리가, 흐름이 길이다. 아이와 함께한 어른도 이 길 안에서만은 아이다. 솜사탕을 물고 풍선을 들고 나팔을 불며 진군하는 아이들. 약간 기울어진 둔덕에서 아이‘떼’가 백수놀이 하는 미니미처럼 굴러 내려온다. 한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아휴 어지러워. 세기를 멈추고 어찔해진 머리를 다시 창공으로 쳐드니, 아휴, 저기서는 구름들이? 다들 갈 길 바쁘신 오후로군요.

  

아이들 무리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방향을 뜬다. 그늘진 숲, 인적 드문 데를 찾아 들어가 돗자리를 편다. 스니커즈를 벗어두고 벌렁 드러누워 팔베개를 한다. 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창공의 속살이 보인다. 살짝살짝 풍기는 은빛 살내.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 그런데 상수리나무들은 왜 이렇게 요란한가, 가만 좀 있어주지. 슬쩍 곁눈질로 보니 썬캡을 두르고 배낭을 멘 아줌마 몇이 나무 밑둥에 줄기차게 발길질을 해대고 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상수리열매들, 그중 하나가 내가 누워 있는 돗자리로 또르륵 굴러온다. 제발 나 좀 숨겨줘. 나는 녀석을 아줌마들이 볼세라 잽싸게 움켜쥔다. 그리고 녀석을 움켜쥔 팔을 이마 위에 얹고, 손의 힘을 살며시 풀어준다. 보이니, 저 속살? 땅에 바짝 드러누운 자에게만 보이는 저 우주의 한 뙈기 땅! 환영해, 이 땅에 굴러온 도토리야.     



나 혼자만 아는 숲이 있다. 당신‘들’과 함께 갔지만 당신이 홀로, 당신이 외로이, 당신이 쓸쓸히, 당신이 고적하게 고여 있을 수밖에 없던 숲. 함께 있지만 결코 함께 있을 수 없었던, 없는, 없을 당신의 숲, 그 숲을 나는 감히 안다.


         



잠자는 숲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매일매일 내 창엔 고운 햇님이

하나씩 뜨고 지죠.

이따금은 빗줄기가 기웃대기도,

짙은 안개가 불꽃 냄새를 풍기며

버티기도 하죠.

하지만 햇님이 뜨건 말건

빗줄기가 문을 두드리건 말건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건 말건

난 상관 안 해요.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않아요.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나는 꿈을 꾸고

그곳은 은사시나무숲.

난 그 속에 가만히 앉아 있죠.

갈잎은 서리에 뒤엉켜 있고.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은빛나는 밑둥을 쓸어보죠.

그건 딱딱하고 차갑고

그 숲의 바람만큼이나.

난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죠.

윗가지는 반짝거리고

나무는 굉장히 높고

나만 가만히 앉아만 있죠.

까치가 지나가며 깍깍대기도 하고

아주 조용하죠.

그러다 꿈이 깨요.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않아요.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하지만 난 조금 느끼죠.

이제 모든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

가을이면 홀로 겨울이 올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내게 닥칠 운명의 손길.

정의를 내려야 하고

밤을 맞아야 하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고.


아아, 나는

은사시나무숲으로 가고 싶죠.

내 나이가 이리저리 기울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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