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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륜휘 Feb 23. 2021

뒷모습

뒷모습에는 표정이 없다

아버지와 사량도 할머니의 뒷모습

  사람의 뒷모습에는 표정이 없다. 공방을 나서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여전히 어색하다. 가기 싫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구구의 친구를 볼 때 나는 긴장했다. 곧 이들의 뒷모습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 왔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시장에 반찬을 얻으러 다녀오던 걸음에 공방에 들르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날도 내가 있나, 없나를 살피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 보였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면 바보 할아버지는 배시시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신다. 할아버지의 수다를 다 듣고 배웅을 할 때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할아버지를 둘러싼 외로움이 한 꺼풀 떨어진다. 틀니로 음식을 씹기가 힘든 할아버지는 오늘도 본죽을 포장해오던 길이었다. 식어버린 죽만큼이나 하루의 이별을 연습하는 것은 고된 일이다.

  인사하는 법은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학습 받는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우리는 친구와 인사하는 철수와 영희를 만나게 될 정도로. 하지만 누구도 내게 작별 인사나 이별 인사에 관해서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이별도 아닌데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뒷모습을 마주할 상상만 하면 얼굴이 경직돼버린다. 늘 같이 붙어 살수는 없는 노릇인데도 그렇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큰 공허감을 남기기 십상이다. 

  어젯밤에는 이런 꿈을 꿨다. 지라산 자락 물줄기를 표류하고 있었다. 강물에 따라 흘러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그곳에는 나의 영정사진 앞에서 젊은이들이 슬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 여기 있어요.”하고 소리쳤다. 아무도 못 알아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철없이 살아있다고 까부는데도, 죽음은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구나. 

  “루니는 인사성이 참 밝아. 귀여워.”

  가룡 마을에서 나는 인상성 밝은 귀여운 아이에 속했다. 그렇게 나를 귀여워하던 할머니들도 이제는 다 돌아가셨다. 상리댁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꼭 그녀에게 잘가라고 인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을 찾아 이리저리 차타고 헤매다가 도착한 곳에서 웃으며 “상리댁, 잘 가”하고 말했다. 모깨때기도 잘 가. 모깨때기는 목계댁이 원래 발음인데 부르다보니 모깨때기가 되었다. 우리 할머니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병원에 누워계셨을 때 너무 슬퍼서 자주 찾아가질 못했다. 병원 입구까지 갔다가 병실에 못 들어가고 나오는 날이 더 많았다. 생각만 해도 슬퍼서 눈물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목이 턱턱 막혀서는 자전거를 타고 병원 밖을 서성거렸다. 

  “할매. 루니 왔어.”

  하고 병실에 들어 갈 수 있는 날은 내가 그만큼 큰 마음 먹고 찾는 날이었다. 

  이야기가 뒷모습에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닮았다. 표정이 안 보여서 나는 죽음과 뒷모습을 분간하지 못한다. 모깨때기가 관에 누워져 있었다. 면으로 된 붕대로 돌돌 쌓여져 있어서 어디가 입술인지 알지 못 할 정도로 슬펐다. 근데 나 말고도 고모들, 삼촌, 아빠, 사촌 언니들 모두 슬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찾아서 뽀뽀를 해줬다. 그리고 “사랑해”라고 말했다. 모두가 한바탕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원래 모깨때기랑 살갑던 것을 알기에 다들 한번씩 “사랑해요.”하고 말했다. 눈물바다 속에서 숨 쉬는 방법도 있기 마련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웃긴 뒷모습도 있다. 그건 구구의 뒷모습이다. 욕실로 들어간 구구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루니.”

  “왜요?” 

  “무슨 일이에요?”

  급하게 욕실 문을 열고 구구를 보았다. 구구는 쑥스럽다는 듯이 등을 내민 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등 좀 밀어줘요.”

  구구가 쥐여 주는 때 타월을 오른손에 꼈다. 밀어도, 밀어도 줄지 않는 까만 때를 보며 기겁을 했다. 

  “구구, 왜 때가 까매요?”

  “쇳가루를 많이 마셔서 그래요.”

  구구는 능청스럽게 혹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다시 때 타월을 왼손에 바꿔 껴서 밀고 밀었다. 이 등어리를 깨끗이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세신사들의 마음을 느꼈다. 이건 등에 대한 정복의 의지라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구구에게 때를 밀기 전에는 비누로 샤워를 하라고 했다. 기름기가 있는 등은 때가 잘 안 밀리기 때문이다. 

  “내가 등을 밀어 주면 기분이 어때?”

  구구에게 물었다.

  “내 등을 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데 안도감을 느껴.”

  “그리고 밀고 나면 기분이 개운하고 너무 좋아. 이적이 부른 <다행이다>라는 노래 가사 알지? 그런 느낌도 들어.”

  구구가 씻고 나왔다. 등에 크림을 발라주었다. 등에도 표정이 있었다. 그날 구구의 등은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뉴스를 보는 목욕탕 집 아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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