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고양이 집사들이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좀처럼 친근감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어려서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인 '전설의 고향' 탓이 클지도 모르겠다.
'전설의 고향'은 매주 일요일 밤에 방송되었다. 여름이면 구미호나 귀신 이야기 같은 등골 오싹한 납량특집물을 내보내곤 했다. 무서운 것은 온 집안의 불을 끄고 서로 꼭 붙어 앉아서 봐야 제맛이다. 어린 우리 형제는 더운 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꼭 붙어 앉아 귀신이 뒤를 돌아볼 것인지 말 것인지, 구미호가 사람이 될 것인지 변신을 할 것인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서는 꼭 아기 울음소리 같은 고양이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곤 했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컴컴한 골목길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했다.
전설의 고향 말고도 그 당시에는 고양이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느 집에서 고양이를 구박했더니 신발에 쥐를 잡아다 놓았다더라와 같이 자신에게 해코지 한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출처 모를 이야기도 전설의 고향 못지않게 떠돌았다. 그런데, 나의 고양이 무섬증에 정점을 찍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읽었던 에드가 알렌 포우의 소설 '검은 고양이'였다. 주인공이 저지른 범죄가 그 자신이 학대했던 고양이 때문에 들통이 나고야 만다는 그 이야기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따라 고조되는 주인공의 광기 묘사가 너무나 탁월해서 어느 귀신 이야기보다 무시무시했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쥐를 잡아 인류의 식량난에 막대한 공헌을 한 고양이에 대한 나의 무섬증은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이 되었다.
청월이와 복걸이
여러 해 전의 일이다. 귀농해서 고흥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에 대학 동창들과 놀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전 방문 때는 없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늘어진 배를 보이며 평상에서 자고 있는 거다. 한참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이번에는 흰 바탕에 검은색과 밝은 미색 무늬의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오더니 그 옆에 벌렁 누웠다. 두 번째 고양이는 허리가 날씬하다 못해 가죽만 남은 꼴이 열흘 굶고도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형국이다.
"시골집이라 쥐가 많아? 고양이를 키우네."
"우리 집 고양이 아니야. 다른 집 고양이인데 우리 집에 와서 살아."
"뭐?"
처음에 누워있던 통통한 놈의 이름은 청월이. 고양이 이름이 기생 이름 같다고 다 같이 웃었다. 하우스 위에 올라가서 달을 쳐다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리고, 나중에 와서 누운 놈 이름은 복걸이. 사람들이 뭘 먹으면 옆에 와서 하도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복걸이가 되었다고 했다.
"집 뒤안(뒤뜰의 전라도 사투리)에 가면 새끼도 있어."
"?????????"
그러고 보니 복걸이의 가슴이 축 늘어져있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중에 뒤뜰에 가보니 귀여운 아기 고양이 세 마리가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대체 친구는 왜 남의 집 고양이를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씩이나 키우게 된 걸까.
저녁이 되었다. 논의 물고를 보고 돌아온 친구 신랑이 삼겹살을 굽고 우리는 술 한잔씩 돌리며 식사를 하다가 고양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양이의 주인은 친구 집 앞 솔숲 너머 흙집에 살았다. 쥐가 많아서 고양이를 키운다는 그는 '고양이도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면서 어지간하면 밥을 안 줬다. 배가 고파야 쥐를 잡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고양이들이 안쓰러웠던 친구는 자주 밥을 챙겨주곤 했다. 그런데, 복걸이가 새끼를 낳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새끼들 때문에 사냥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복걸아는 새끼들이 걸을 만큼 자라자 친구 집으로 새끼들을 데리고 살러 왔다.
고양이 집사들은 알겠지만, 고양이는 집에 대한 애착이 무지 심한 동물이다. 더구나 어린 새끼들에게 친구의 집은 얼마나 멀게 느껴졌겠는가.(시골집은 빤히 보여도 거리가 상당하다.) 복걸이는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새끼들을 다독이며 몇 날 며칠을 걸려 친구 집으로 왔다. 첫날, 서너 발자국 따라오던 새끼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둘째 날 다시 새끼들을 재촉해서 길을 떠난다. 둘째날은 첫날 걸은 거리보다 조금 더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또 하루. 이렇게 여러 날 걸려 마침내 친구네 집까지 오면 새끼들이 다 클 때까지 자기 집으로 안 가고 버틴단다. '먹을걸 줘~' 하면서. 서툰 농사일에 치여 매 끼니 챙겨주는 게 힘들었던 친구는 아예 커다란 사료를 사다가 봉투째 맡겨 놓았다. 이른바 자율배식이라고나 할까.
복걸이는 여러 번 새끼를 낳았는데 그때마다 친구네서 해산 구완을 받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해 봄에는 새끼 낳을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복걸이가 사라졌다. 주인도 찾아다니고 친구네도 복걸이를 찾아다녔다. 새끼를 밴 고양이가 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친구네 집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는데, 친구 집 축대 밑으로 스님 한 분이 사놓은 빈 집이 한 채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친구네 아이들이 그 축대 밑 스님의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친구가 얼른 내려가 보니 복걸이가 그곳에 새끼를 놓았더란다. 영리한 복걸이가 친구 집 가장 가까운 곳에 새끼를 놓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끼들이 눈 좀 뜨고 걸을만하자마자 바로 울타리를 넘어 친구 집에 입성하여 오늘에 이렀다는 이야기다.
새끼들은 사료를 먹을 만큼 충분히 컸지만 복걸이는 여전히 젖을 먹였다. 새끼들에게 뜯겨(?) 앙상하게 뼈만 남은 복걸이는 늘 허기져서 사람들이 뭔가를 먹기만 하면 가까이 와서 애걸복걸. 그래서 복걸이다. (심지어 안 주면 강탈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얻은 고기는 꼭 새끼들부터 먹였다..)
복걸이의 원주인이 복걸이한테 푸짐하게 주는 먹이가 딱 한 가지 있었다. 복걸이의 주인은 환경을 파괴하는 외래종 물고기인 블루길 낚시가 취미였다. 그는 블루길을 잡으면 산 채로 복걸이에게 던져준다. 그러면 복걸이는 블루길을 입에 물고 친구 집으로 달려온다. 블루길이 퍼득이면 중간중간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물었다 하는 힘든 여정이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단다. 커다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자식들에게 달려오는 복걸이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짠하다.
복걸이네 식구들은 완전히 친구네 식구가 되었다. 복걸이의 자식의 자식들은 여전히 친구 집에 산다. 벌써 십 년도 전 이야기다.
길냥이
올 가을,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던 차에 저녁이면 운동삼아 동네 걷기를 시작했다. 송내 대로를 건너 중동시장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아파트 둘레 산책로를 지나 상동호수공원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동네 구석구석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저녁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가장 감성적으로 되는 시간이라는데, 이어폰 꽂고 음악을 듣으며 걷다 보면 해외여행 부럽지 않게 세상이 뮤직비디오로 보인다.
공네 걷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동네에 고양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파트 화단 낮은 대숲 속에 숨어 살고 있는 흰 양말에 흰 수염이 인상적인 검은 고양이 가족, 집 앞 공원에서 사람들이 오던지 가던지 아랑곳 않고 나무 벤치를 차지하고 오수를 즐기던 검고 흰 고양이 세 마리, 시냇가(아파트 주변으로 인공 시내가 흐른다.)에 터 잡고 있는 얼룩 고양이 등. 놈들은 산책길 어느 곳에선가 나타나서 나무 울타리 사이로 잽싸게 숨어든다. 가끔 잔디나 풀 숲 사이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그 오묘한 동물과 눈싸움을 할 때도 있다. 거친 야생의 삶에도 기죽지 않고 나를 노려보면 나 또한 그들을 노려본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쪼쪼쪼쪼 하면서 불러보기도 한다.
나는 이미 훌쩍 크는 것을 넘어서 반백이 넘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처럼 고양이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영리하고 독립적이며 깔끔쟁이 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여전한 미지의 생명체다. 그들을 어린 시절처럼 무서워하지 않지만 같은 공간에서 삶을 나눌 만큼은 아니다. 대신 그들의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눈빛과 단단한 자세를 바라보는 것은 괜찮다. 유연한 허리와 도톰한 두 발로 정지된 채 앉아있는 태를 보는 것도 괜찮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람처럼 날쌔게 풀숲 사이로 사라지는 민첩함도 괜찮다. 나도 그들도 서로 침범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의 그들을 보는 것이 괜찮다. 그리고 그림 안에서 화해불가능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고양이는 정말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