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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pr 07. 2024

그림을 그리자

그림을 그리자

인물이나 풍경을 그리든 꽃이나 기물을 그리든, 학생들을 지도할 때 가장 지도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구도에 대한 설명이다. 구도는 화면(도화지)안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어떤 시각적 질서를 가지고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는 일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는 작가나 미술교사들은 화면이 작은 세상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 좀 더 나은 배치인지 그냥 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리는 행위와 관련한 다양한 훈련을 했고,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많은 수의 미술 작품을 보았으니 아마도 좀 더 훈련된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그리는 것을 보면 답답할 때가 가끔 있다.


"왜 이렇게 그리지? 이 넓은 화면에 이렇게 작게 그리면 저 넓게 비어있는 공간은 어쩌라고. 손 크기는 또 왜 이리 작은데? 대충 봐도 손이 이렇게 큰데, 안보이나? 이게 더 좋아보이는 걸까?"


몇번의 지적에도 학생들의 그림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도데체 왜 선생님이 잘 그리고 있는 자신에게 이런 저런 지적을 하는지 당황스럽다. 교사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교사들이 보고 있을  '그 무엇인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술 교사들은 어떨까? 왜 저것이 이것보다 나은지 학생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의 경험으로 보건데, 이건 진짜 간단치 않다. 어린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니 홍시'라고 이야기한것 처럼 교사들 또한 그 부분이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것 같다. 그럴까? 본능적으로??  


본능이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어떤 성질이다. 그런데, 이런 걸 본능이락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오랜 시간동안의 교육과 경험을 통해 얻어진 후천적인 것에 가깝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천재 빼고. 나는 천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단지 그것과 관련된 경험이 부족한 것 아닐까?


어느 누구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상상할 수 없다. 외계인을 그린 그림들을 보라. 외계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외계인을 그리려면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조합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 어딘가를 닮게 그릴 것이고, 외계인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이질적인 요소 몇 개가 더해질 것이다. 이를테면 파충류의 모습으로 외계 생물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동식물의 형태를 빌기도 하고, 더러는 친근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이등신이 되기도 한다.(스필버그 감독의 외계인 ET는 전형적인 이등신에 만화주인공처럼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대단히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는 행위나 보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그리는 것에 대한 경험이나 그려진 작품을 감상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미술 교과가 있고 수업이 있을 것이다.  


중학교 학생들과 친구 모습 그리기 수업을 하면 자주 보게 되는 그림 유형들이 있다. 먼저, 도화지의 크기에 비해 인물을 지나치게 작게 그린다는 유형이다. 아무리 '좀 더 크게 그려봐. 도화지에 꽉 차게 그려.' 라고 이야기해본들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가끔 흉상(가슴까지만 그린 인물화)을 그릴 때면 도화지 한 가운데에 인물을 조그맣게 그리고 마치 증명사진이라도 된 양 인물 가슴께에 선을 그려 그림의 범위를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왼쪽)인물이 지나치게 작게 그려져 배경이 허전하다. 인물의 손발의 비례가 맞지 않고 후드 모양도 어색하다. (오른쪽)왼쪽 그림의 배경을 잘라 적절한 크기의 공간만 남겨보았다.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은 독립된 세계

평면에 그리는 그림, 회화는 본질적으로 환영이다. 사람은 삼차원의 공간에 살제로 존재한다. 앞, 뒤, 옆, 위가 다 있고, 내가 그 사람을 어떤 위치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른 그림이 된다. 사실, 모델과 도화지에 그려진 사람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기껏해야 도화지 위에 그려진 몇 개의 선일 뿐이다. 우리는 그 선의 뭉텅이를 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본들 코가 만져지겠는가, 눈이 만져지겠는가.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릴 수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 그림 속의 선 뭉텅이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림은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도화지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네모네모한 창으로 바라본 바깥의 풍경, 그것이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이다. 화가는 창에 매달려 바깥 세상을 바라본다.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은 세상을 그린 것이지만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다. 도화지가 갖는 이런 약속을 깨달아야 도화지에 적절한 크기로 그릴 수 있다.(물론 큰 도화지에 조그맣게 사람을 그린 그림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그림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게 그릴 것인지 크게 그릴 것인지 정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구도틀은 도화지 위의 세상이 실제의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가상 세계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사실 나는 그동안 수업에서 이런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술 수업은 잘 그리는 방법을 가르키는 수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시지각에 대해 공부를 하다보니 잘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 '보기'위해서 이런 도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술이 자신의 생각을 시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예술 방식이라면 미술 수업은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매체나 도구를 익히는 것이 미술 수업의 목적은 아니지만 도구로 잘 사용할 수 있다면 학생들의 표현도 좀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구도틀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팔고 있지만 굳이 이런 것 까지 돈주고 살 필요는 없다. A4크기의 도화지에 네모난 구멍을 뚫으면 끝. 그 네모를 통해 대상을 보는 것이다. 네모난 틀로 인물을 보면서 가슴까지 그릴 것인지, 허리까지 그릴 것인지, 몸 전체를 그릴 것인지를 정하고, 네모난 틀이 보여주는 대로 그리면 된다. (잠깐, 구도틀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한 쪽 눈을 감고 보는 것이 좋다.)

다음 그림은 구도틀을 사용해서 그렸다. 위의 전신을 그린 그림과 비교해보자.(같은 학생이 그린 그림이다.) 인물의 배치는 물론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도 좀 더 성공한 듯 보인다. 구도틀을 사용한 쪽이 표현 의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관찰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이 보인다. 구도틀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쓸 필요는 없다. 몇 번 사용하다 보면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구도틀 하나쯤은 그냥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양식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결국 작가든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든 자신이 처한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본다는 것은 일종의 규격화된 시대의 보는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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