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디지털 매체로 수업을 하고 계신가요? 어떤 수업을 하고 계세요? 시각 이미지나 동영상을 만드는 수업을 하고 계시다고요? 팬데믹 시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메타버스는요? 혹시 AI를 활용한 수업도 하고 계신가요? AI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죠. 최근 오픈 AI사의 인공지능 소라가 짧은 문장 만으로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실감 넘치는 동영상을 만들어 냈다는 뉴스를 봤어요. 아, 이제 예술은 끝난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고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예술가들도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새로운 표현을 상상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스멀스멀 올라오죠. 나도 디지털 매체로 수업을 해볼까? 생각하다가도 왜 이렇게 장벽이 많은지.. 일단, 기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죠.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요. 또 아이들도 다룰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미술 수업으로서의 유의미한 가치에 도달해야 하고요.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의 디지털 매체를 다루는 수준은 천차만별이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장벽, 귀차니즘이....크흑흑....왜 꼭 디지털 매체로 수업을 해야 하죠? 그거 아니어도 재미있는 수업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2. 오늘 이야기는 저의 첫 디지털 매체 수업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미 잘 활용하고 계신 샘들께는 다소 지루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저의 디지털 매체에 대한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저는 전통 매체의 장점을 굳게 믿고, 전통 매체 중심 수업을 해 온 고경력 교사예요. 다만,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수업을 해왔고, 포토샵이나 동영상 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어서 디지털 매체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없는 편이긴 해요.
왜 배색 수업이었을까?
작년에 제가 했던 디지털 매체 수업 주제는 색의 배색이었어요. 사실 배색 수업이란 게 고만 고만 하잖아요. 들이는 시간에 비해 효과가 좋은 지도 잘 모르겠고요. 색채 수업에서 배색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는데, 쉽게 접근할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한 번은 경기도 양혜진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선생님의 수업 사례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배색 수업은 디지털 매체가 전통 매체보다 강점이 많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화면을 구성하고 색을 칠하는 복잡한 과정을 몇 번의 클릭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정말 신박하지 않은가요?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배색이미지들
경기도 양혜진선생님의 배색수업. 자연과 명화에서 배색을 찾고, 실생활과 연결했다.
저는 전체 수업을 기초와 활용으로 나눠서 계획해 봤어요. 기초에서는 프로그램 사용법 학습과 배색 실습을, 활용에서는 색채계획을 세워서 패키지 디자인에 적용해 보는 수업으로 구조화했어요. 주변 선생님들에게 앱을 추천받고, 유튜브를 보면서 사용법을 익혔고요. (혼자 공부하니 좀 힘들더라고요. 샘들은 꼭 주변 선생님들과 같이 공부하세요. ㅠㅠ) 정보부에서 갤럭시 탭을 빌려와서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아이들에게 나눠 줄 학습지도 만들었어요.
아래 이미지들은 기초 수업 시간에 배색 실습한 결과들이에요. 유사색, 반대색, 명도가 높은 색 등 다양한 조합으로 배색을 하면서 느낌 차를 보는 거예요. 두 시간에 각각 네 장에서 여섯 장의 배색 이미지를 만들었죠. 이 과정이 충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어떤 영역에서든, 가령 회화든 디자인이든 배색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거든요. 아이들도 생각보다 이미지를 잘 만들어서 이걸 바로 다른 수업으로 연결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뒤늦게 했어요.
왼쪽 : 학생들의 배색실습 이미지들 / 오른쪽 :출력한 배색 이미지들
활용 수업인 패키지 디자인은 가게 주인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가게에서 사용할 쇼핑백을 디자인해 보는 수업이에요. 디지털이 좋긴 좋더라고요. 배색을 바꾸는 게 얼~마나 간단한지.... 전통 매체였다면 아마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겠죠?
마지막 시간에는 출력해서 진짜 쇼핑백으로 만들었어요. 태블릿 속의 디자인을 현실로 끄집어내고 싶었거든요. 완성 후 미술실 벽에 붙이면 끝! 이러면 전시와 제출이 한꺼번에 해결되지요.
한번 더 도전, 가상공간 디자인
공부한 건 잊기 전에 한번 더 써먹어야죠. 저희 학교는 집중 이수제라 2 학기 수업 반을 대상으로 디지털 매체 수업을 다시 계획해 봤어요. 이번에는 시각 디자인으로 시작해서 가상공간 디자인으로 마무리하는 프로젝트 수업을 하기로 했어요. 시각 디자인 부분은 1 학기와 마찬가지로 갤럭시 탭으로, 가상공간은 노트북에서 코스페이시스(Cospaces)로 만들었어요. 코스페이시스 사용과 관련해서는 서울 탁대희 선생님께 조언을 좀 받았고요. 물론 유튜브로도 공부했죠. 또 막 시행착오가.....커흑!
코스페이시스는 코딩을 몰라도(일단 제가 몰라요.) 자체에서 제공하는 오브젝트 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놀 수 있었어요. 다만 무료로 쓸 수 있는 베이직 버전은 오브젝트가 너무 적어서 재미가 덜해요. 풀 버전을 쓰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눈물 나게 많이 비싸요. 작년에는 발품을 열심히 팔아서 한 달 동안 무료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올해는 프로그램 사용료를 학교 예산에 반영해 놓았어요. 절약도 좋지만 너무 짠내 나는 건 이제 힘들어서요.
완성하고 나면 코스페이시스 갤러리에서 공유한 후 PC나 스마트폰 앱에서 3D로도 감상할 수 있어요. 특히 앱으로 보면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 체험도 가능해요. VR은 기기가 없으면 안 되지만 증강현실(AR)만 체험해도 정말 재미있어요. 손바닥 위의 가상공간, 완전 귀엽죠!
아래 동영상은 증강 현실로 체험하는 짧은 영상이에요. 미술실 책상 위에 짠~ 하고 내가 디자인한 가상공간이 펼쳐지지요. 아이들도 나도 와! 감탄을.... ㅎㅎ
요새는 증강 현실보다 혼합 현실(MR)이란 용어를 더 많이 쓰던데, 멀지 않은 미래에는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디지털 매체 수업, 처음 해보는 아이들이 많아서 어려워하긴 했지만 잘 따라와 주었어요. 저도 생각보다 재미있었고요.
마지막으로, 수업을 하면서 느낀 점들을 정리해 봤어요.
* 디지털 매체 수업은 전통 매체 수업과 어떻게 다를까요?
매체가 달라지면 경험의 형태와 질이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져요. 전통 매체의 창작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지요. 과거의 경험 위에 현재의 경험이 쌓이는 거예요. 아무리 간절해도 되돌리기(Ctrl+z)는 불가능하죠. 반면 디지털 매체의 경험은 분절적이고 비연속적이에요. 며칠 전 완료한 작업만 딱 꺼내서 수정할 수도 있고, 크기와 위치를 바꿀 수도 있어요. 마치 콜라주 같죠. 아이디어와 편집이 중요해요.
결국 디지털매체 수업은 아날로그와 다른 디지털세계관을 배우고 활용하기 위한 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이미 디지털 세계에 살고 있고 그에 기반한 사고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창작 과정도 경험하는 거죠.
* 디지털 매체의 경험이 강렬할수록 현실의 감각과 경험의 중요성은 더 커져요.
사랑하는 연인과 아무리 영상통화를 오래 한들 실제 만나는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 앱에서 하는 도자기 체험과 온몸으로 진짜 흙을 만지는 감각을 비교할 수 있겠어요? 디지털 세상은 본질적으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러니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죠. 아니면 디지털 세상은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실재하는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요? 가능하다면 디지털 세계와 현실 감각을 함께 고려한 수업을 디자인하면 좋을 것 같아요.
* 꼭 전문가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수업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비용문제였어요.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앱은 인 앱 광고가 없는 게 없어요. 제가 썼던 메디방 페인트도 수시로 광고가 떠서 스트레스를 좀 받았어요. 유료 버전을 쓰면 좋겠지만, 부족한 실습비나 가성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해요. 한 달 정도 쓸 수 있는 저렴한 교육용 프로그램 같은 게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 프로그램이 아니라 내용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시대죠. 오늘 흥미롭게 보이는 프로그램이 내일도 살아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특정 프로그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가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중심이 분명하다면 프로그램의 종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죠. 그저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 이런 연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것의 본질은 디지털이나 아날로그나 다 비슷한 것 같아요. 다만, 혼자 공부하는 것의 한계는 분명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만일 어떤 수업이 있다면, 그 선생님의 학생이 되어 실제 수업 과정 그대로 수업을 받아보는 연수가 있으면 어떨까요? 단순한 전달 연수가 아니라 일종의 수업 워크숍 같은 거요. 그러면 학생들이 어떻게 배우는지, 교사가 수업 주제와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그 노하우들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학생들은 다 이렇게 학습하는데, 교사인 우리는 더 잘 배우지 않을까요? 교육청 연수는 대부분 에듀테크 중심으로, 특히 프로그램 사용법을 중심으로 개설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4. 나가며
어느 날 문득 저를 돌아보니 제가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수업만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낯선 것들은 귀찮아하고요. 귀차니즘과 두려움 그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들어가 보니 생각처럼 어렵거나 귀찮지는 않았어요. 저는 올해도 디지털 매체 수업을 계획중에 있고, 아마도 작년과는 또다른 버전의 수업이 될 것 같아요. 무엇이건 시작을 해야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