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부담 없이 찾는 대화소재들이 있다. 이 소재들은 이미 널리 쓰이고 있어서 (특히 데면데면할 때) 편리한 화젯거리가 된다. 예를 들면 날씨가 그렇고 점심메뉴가 그렇고 운동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고 취미가 그렇다. 단연 술도 그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보통은 술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게 되는 것 같다. 각자의 술 취향이나 술과 관련된 어떤 순간들, 또는 어떤 술과의 궁합이나 술 마시는 습관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 진과 럼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한 동안 내가 럼을 마시면 기분이 들뜨고 진을 마시면 기분이 가라앉는 체질이라고 확신한 적이 있었다. 몇 년 간 쭉 그렇게 믿고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진과 럼을 마셨는데 둘의 효능이 서로 뒤바뀌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냥 처음 럼을 마셨을 때 신나는 상황, 처음 진을 마셨을 때 우울한 상황이어서 각 술의 이미지가 그렇게 각인된 것뿐이었다. 근데 아니면 또 어떤가? 어쨌든 덕분에 당시에는 술과 나 사이에 특별한 나만의 의미가 생겼던 것을.
"와인은 낭만과 연결되고 위스키는 고독이 떠오르죠. 그래서 똑같이 취하더라도 와인을 마시면 기분이 들뜨고 위스키를 마시면 기분이 차분해집니다” (71p)
모르긴 몰라도 글쓴이도 그 당시의 나처럼 와인과 위스키에 비슷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서 공감이 됐다.
감각(오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개인경험으로 연결되는 경향이 특히 강한 것 같다. 색깔도, 음악도, 향기도, 맛도 그렇다. 특정 냄새나 소리에 의해 과거의 어떤 장면이 소환되는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을까? 맛, 그중에서도 술이 주는 강렬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단순히 달달하고 씁쓸한 맛뿐만 아니라, 정신을 알딸딸하게 만드는 기능성, 그리고 그 덕분에 더 친밀하고 진솔해질 것 같은 이미지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여러 가지 매개 중에서도 특히 매력적이다.
소설을 입은 술
여기에 더해서 글쓴이는 소설이라는 맥락을 끼얹었고, 술은 보다 섬세하고 풍부한 코드로 거듭났다! 이제 술이 떠올리게 하는 것은 맛, 제조법, 나만의 의미와 감상을 넘어,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소설 속의 이미지, 또는 소설 속의 의미까지 확장 가능하다.
마티니는 단지 진에 베르무트를 섞은 후 올리브로 장식한 무색 투명한 칵테일이 아니라, '한 겹의 위선조차 허락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띨 수도 있다. 버드와이저는 그저 맥주창고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를 때 무난하게 선택하게 되는 병맥(사견입니다..)에 그치지 않고, '적당히 꿈이 꺾인 서른 즈음의 여성 인물들, 늙지도 젊지도,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음’을 상기시킬지도 모른다.
이런 '술과 책'이라는 코드를 점점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그걸 기반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술의 근사한 재발견이 아닐 수 없겠다. 최근 책바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입소문이 나면서 그런 움직임이 조용히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꼭 타인과의 대화에서가 아니더라도, 작가와 나 사이에 공감대를 넓혀주고, 술과 나 사이에 감상을 두텁게 해 주고, 나와 나 사이에서도 세분화된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이미 이 코드는 충분히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