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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May 22. 2019

깊은 밤 화장실에서

깊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다.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창 밖으로 가끔 살짝살짝 반사되던 큰길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도 전혀 없이 모두 잠들어 있다. 잠시 멈춰 서서 무슨 소리인지 고민하면서 그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면대의 도기 같은 것과 쇠파이프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윗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윗집 세면대의 파이프 쪽에 문제가 있어서 수리하는 것 같았다. 만약 세면대가 고장이 난 거라면 고치기가 어려울 텐데 왜 그걸 밤중에 하는지 궁금했다. 방으로 다시 들어간 후에도 한동안 그 소리가 계속 들다.


나는 가끔 밤중에 잠을 깨는 습관이 있다. 소변 때문인 경우가 더 많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아침까지 깨지 않고 쭉 자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단 한 번 깨고 나면 아침까지는 숙면을 못한다.


깊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다. 거실의 공기청정기도 돌아가지 않고 조용다. 공기도 먼지도 모두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낮은 톤의 기계 소리였다. 타일 벽에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면도하는 소리였다. 역시 윗집 남자가 내는 소리였다. 굉장히 작은 소리여서 판단하기가 어렵긴 했지만 면도기 소리로 가늠해보 윗집 남자는 수염이 그리 많이 나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남편은 매일 아침 면도를 해도 저녁에 들어올 때면 시커먼 수염이 얼굴을 덮어버린다. 딱딱하기도 철근 같아서 면도할 때 들어보면 아스팔트 갈아엎는 듯한 소리가 다. 그런데 사각거리는 소리만 나는 걸 보면 윗집 남자의 수염양도 많지 않고 두께도 가느다란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당신 요즘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남편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무심 듯 한 마디 던졌다.


"그래? 요즘에 특별히 다이어트하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무슨 고민 있는 건 아니지?"

"고민? 고민은 무슨.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왜?"

"나도 몰라. 그냥 새벽에 한 번씩 꼭 깨지더라."

"그래?"  


깊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다.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역시 윗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원색적이긴 하지만, 윗집 남자가 변기에 앉아서 몸무게를 줄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변기에 앉아서 몸무게를 줄였다. 한동안 변기에 앉은 채로 윗집 소리에 두 귀를 모았다. 생각해보니 윗집 남자는 상상하기도 싫은 배설물을 곧바로 내 위에서 내 머리 위로 쏟아내고 있었던 거 아닌가. 모든 감각이 윗집으로 향하도록 천장 쪽으로 귀를 향하고 들어보았다. 낼 수 있는 소리다 내고 있었다. 에 들어가 누웠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럽게 시원하겠군.'

  

"당신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몸이 반쪽이 됐어."

"왜 또 그래? 그렇게 날씬해 보여?"

"몸무게 재봤어? 몸통만 가늘어진 게 아니고 키도 줄어든 것 같다니까."

"난 못 느끼겠는데."

"진짜 무슨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니지?"
"안 좋은 일? 그냥, 새벽에 잠이 자꾸 깨져서."

"늙어가는 거 아냐? 나이 들면 밤에 자꾸 눈이 떠진다며."

"무슨 소리? 이제 서른아홉인데."


깊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다. 큰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음악 소리도 들렸고 물소리도 들렸다.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올라서서 천장 쪽에 귀를 붙였다. 노래는 마이웨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놓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간간 따라 부르는 남자의 노소리도 출렁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도대체 윗집 남자의 직업은 뭐고 생활 패턴이 어떻게 되길래 마다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쇼를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당신, 이젠 정말 안 되겠다.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나랑 병원에 가보자."

"왜?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냐. 뺨에 있는 살이 완전히 푹 꺼져서 보조개생겼어."

"보조개? 어디, 왼쪽? 오른쪽?"

"허리도 너무 가늘어서 내가 한 손으로 잡아도 한 줌밖에 안 될 것 같아."

"드디어 처녀  허리로 돌아가는 건가? 자기 따라서 먹느라 배만 나왔었는데 잘 됐네."

"그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목 부분은 왜 색깔이 거뭇거뭇해지는 거지?"

"그거야말로 나이 들어서 그런 거야. 목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 건데."


깊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다. 거실 창문에 빗방울이 추적추적 부딪히고 있었다. 좀 추운 것 같아 카디건을 입었다.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면서 윗집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귀를 붙였다. 뭔가 직직 끄는 소리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붙인 귀를 떼지 않고 그대로 따라 올라갔다. 위층과 가까워졌는데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 귀가 벽의 위쪽에 다다랐을 때 직직 끄는 소리는 멈췄는데 남자의 거친 숨소리 들렸다.  


'슬리퍼 신은 남자와 하이힐 신은 여자가 화장실에 같이 들어간 건가. 이 에 이거 19금으로 가면 곤란한데.'


벽에 붙인 귀를 여전히 떼지 않고 계속 올라가서 천장에 귀를 붙였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멈춘 듯 갑자기 조용했다. 천장에 귀를 더 바짝 붙였다. 너무 조용했다.

천장에 붙은 귀 때문에 몸이 거의 뒤집어졌다. 찡그린 눈 위로 천장이 이불처럼 나를 덮고 있었다. 내 몸이 천장에 붙은 채로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빡'


엄청나게 딱딱한 물체가 내 머리통을 아주 세차게 가격했다. 마치 트럭 한 대가 날아와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너무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 충격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어깨부터 바닥에 닿는 바람에 어깨뼈가 다 으스러진 것 같았다. 너무너무 아팠지만 이렇게 정신을 놓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려고 두리번거렸다.

남편이었다.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나를 다시 내리치려고 성난 얼굴로 화장실용 슬리퍼를 쳐들고 있는 사람은 내 남편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슬리퍼에 다시 얻어맞아서 곧바로 깔려 죽겠구나 싶었다. 변기 뒤쪽 어둡고 후미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부러진 어깨가 너무 아파서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질질 끌며 죽을힘을 다해 변기 뒤로 겨우 피했다.


"여보, 좀 나와봐. 화장실에 바퀴벌레가 있는데 되게 커. 매미 해. 한 대 치긴 했는데 안 죽은 거 같아."


누런 물때가 잔뜩 껴 있는 슬리퍼 밑바닥이 내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여보, 우리 바퀴벌레 약 있나? 아! 요 놈 어디로 간 거야? 제대로 맞은 거 같은데, 요즘 바퀴벌레들이 더 독해졌다니까. 너, 일단 꼼짝 말고 있어."


남편이 슬리퍼를 바닥에 툭 내려놓더니 화장실을 나가서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여보, 저 놈 잡고 자야 돼. 일어나봐. 여보. 여보, 어디 있어? 자다가 어디 간 거야? 여보."


남편이 이 방 저 방 불을 켜면서 더 큰 소리로 나를 찾으며 돌아다녔다.


"여보, 밖에 나간 거야? 핸드폰도 그대로 있는데 어디 간 거야? 여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걸 깨달았다. 너무 아프고 겁이 나고 황당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으로 눈물을 닦는데 끈적끈적한 점액 같은 게 얼굴에 묻어 눈물과 범벅이 되어버렸다.   


윗집 남자의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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