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짱 Jun 05. 2021

넌 나 없이도 잘 살 거니까

사랑과 자존감 사이

"넌 나 없어도 잘 살 거니까..."


예전 남친들에게 거의 빼놓지 않고 들었던 얘기 중에 하나다. 절반쯤은 헤어질 때 얘기했고, 절반쯤은 중간중간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 말했다. 헤어질 때 얘기하는 경우에는 뭐라고 대꾸하기조차 싫었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 말할 때는 상대가 안쓰럽긴 해도 성격상 립 서비스는 못 해줬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간이라면 무릇 스스로 독립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오롯이 혼자서 설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또 타인에게 기댈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물론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나도 '다 필요 없고 난 나 혼자면 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된 존재여야 하고, 성인으로서 독립적인 일상 자체를 영위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다시 전남친들이 했던 말에서 말 줄임 된 부분을 살펴보자.


"(넌 나 없어도 잘 살 거니까) 나는 내가 꼭 지켜줘야 하는 다른 여자를 만나야겠어."

첫째, 헤어지자고 말하는 입장에서 저렇게 이별의 이유를 상대에게 전가하는 건 매우 치졸하고 못난 짓이다. 남녀가 헤어지는 데에는 계기가 무엇이었든 그걸 극복할 만큼의 애정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지는 당시에는 왜 나랑 헤어지고 싶어 하는 걸까, 하고 이유를 찾아내고 싶지만 마음이 진정된 후 잠깐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뭐가 됐든 결국 관계를 지속할 만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원래 가장 심플한 게 진실인 법이다. 

둘째, 여성은 남성이 일방적으로 지켜줘야 하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관계는 언제나 상호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관계에서 필요한 건 '보호'가 아니라 '존중'이기 때문에 가치관 자체가 동등한 관계에서 어긋나 있다.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밑도 끝도 없이 어디서 저런 발상이 나왔는지 몰라 잠시 얼이 빠졌다. 뒤이어 '네가 한 말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해주마'라는 회오리가 뱃속에서 생성되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그런 정성이 무어냐 싶어 도로 꿀꺽 삼켰다. 


"(넌 나 없어도 잘 살 거니까)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져서 슬퍼."

애정을 갈구하는 요청이긴 하지만 본인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뭔지 모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평소에 애정으로 우쭈쭈 투자를 열심히 했지만 자존감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경우다. 이제까지의 나의 우쭈쭈 투자가 수익은커녕 원금까지 손실되었다는 알림과 같다. 자기애라는 바닥이 있어야 그 위에 타인의 애정도 쌓일 수 있는데, 자기애에 구멍이 있다면 상대가 아무리 애정을 쏟아부어도 먹깨비처럼 다 먹어치우고도 계속 배고파한다. 열정(일명 콩깍지)이 남아있는 상태라면 계속해서 애정을 줄 수 있지만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다면 헤어질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넌 나 없어도 잘 살 거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지?"

첫째, 그냥 I love you, 하면 Love you more,라고 답해줄 텐데 저렇게 꼬아서 말하는 건 좋은 소통 방식이 아니다. 따뜻했던 마음도 차게 식는다. 

둘째, 아직 관계를 맺는 수준이 아직 도구적 관계에 머물러 있는데 부족한 자기효능감과 자기확신을 관계를 통해 외부에서 채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도 더 성숙했다면 좀 더 다독거려 줬을 텐데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투정 같지도 않은 투정에 마음의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살아갈 텐데, 너 없어도 잘 살겠지. 당연하잖아?"


그건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 계속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지배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위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덜 선호된다. 

(사랑은 사치일까, p.172)


그래서 결국 그네들 예상대로 너희들 없이, 별일 없이 산다. 

아마 같이 살았다면 별일이 무지하게 있었을 것이다. 


Photo by Brian Lundquist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