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지만 친하지 않은,그런 사이

by JMK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지만,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어린 시절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실을 느끼면서 아버지와는 대면대면하게 지냈다. 나름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철없이 즐겁게 대학생활하는 철부지였다.


엄마는 내가 대학 3학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스무 살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의 중심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툴게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가장이었지만 성실하셨다. 말씀은 많지 않으셨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하셨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답답했다. 무엇이든 아버지 방식대로 해야 했고, 내 의견은 좀처럼 반영되지 않았다. 엄마는 늘 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주셨다. 그런 엄마의 부재는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대화는 줄어들었고, 집안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선언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겠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합쳐졌다.



전공과 무관한, 영화 분장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완강하셨지만, 엄마 없는 나를 조금은 안쓰러워하셔서 못 이기는 척 보내주셨다.


서울에서 영화 분장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기술도 부족했고, 인맥도 없었다. 하지만 분장일은 재미있었다. 배우들의 얼굴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일이 흥미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금전적으로는 힘들었다. 프리랜서의 삶은 불안정했고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컸다.


그때 아버지께서 도와주셨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20년이란 세월 동안 일도 제법 하게 되었고 결혼은 자연스럽게 나와 먼 얘기가 되었다. 나만의 자유로운 인생을 즐겼고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아버지께 한편으로는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시고 열심히 일하셨다. 주야간으로 일하시면서 나의 서울 생활에 도움을 주셨다.


2002년,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지만, 그때의 아버지는 젊으셨고 잘 이겨내셨다.


그때 나는 무서웠다. 엄마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을까 봐.

다행히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왼쪽 팔다리에 찌릿찌릿한 기분 나쁜 통증이 늘 있다고 하셨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셨고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셨다.


우리 부녀는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다른 곳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우리 부녀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평소 뭘 하시며 지내시는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몰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사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


그냥 서먹한 부녀사이였다. 가족이지만 친하지 않은, 그런 사이였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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