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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Aug 24. 2020

인간과 음악  (2)

우리는 음악의 무엇에 공명하는가?


나의 전공분야 이외의 매우 다양한 음악을 듣는 요즘이다. 무엇보다 한국 대중음악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다 보니 흥얼거리는 케이팝 노래도 생겼다. 음악을 듣는 일은 그 음악을 만드는 주체 그리고 향유하는 주체들의 삶을 이해하는 적극적으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또한 특정 음악에 공명하는 자신을 잘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세계관과 지향하는 가치 등을 거꾸로 가늠해볼 수도 있다. 90년대의 평범한 학생의 삶을 산 나의 과거 삶과 접점이 있던 <싹쓰리>의 프로젝트성 음악을 즐겨 감상한 것을 보면 내가 특정 연령대의 한국인의 감성의 영역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악가로서의 지향점과 세계관으로 공명한 경우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 AACM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he Creative Musicians)의 멤버와 그와 인연이 있는 음악가들의 음악이 그러했다.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남다른 공명을 경험하면서 관련된 책을 보고 그 음악가들의 세계관과 태도를 알아가면서, 내가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 저항정신, 개성적인 목소리와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는 점이 그러하다. 음악에 담긴 그 음악가들의 의식세계가 나의 것과 유의미한 소통을 한 것이고 음악을 통한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들의 음악은 든든한 선배가 되어 내게 음악가로서 더욱더 진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해주었다.


편집 "당하는" 개인의 문화적 경험


힘을 가진 매체들은 우리의 경험을 큐레이팅 하는 다수인 개인의 문화적 경험의 편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매체가 아닌 전문매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닿는 정보는 이미 걸러지고 편집된 것이고 이들은 우리가 무엇을 가치롭게 여길지 말지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을 제공하기도 한다. 문제는 편집의 주체가 부당한 편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편향성 bias은 각자의 중심을 가진 모든 개인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명백한 차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정보의 부족이 원인,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여 운영될 때 부조리함이 고개를 들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편향성은 경계해야 한다. 다만 매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쉼 없이 자기 쇄신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일반시민은 매체가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고, 또 스스로는 편향성을 염두에 두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기도 하다. 특히 올해 들어 BLM운동이 확산되면서 대중의 문화 경험을 "만들어내는" 문화예술기관들의 인종차별적 습성을 비판하며 대대적인 혁신과 유형의 조치를 취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Composing is Racist"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제보가 된 수많은 음악가들의 차별적 경험이 낱낱이 공개되고 있다. 클래식계와 같이 지극히 백인 남성 중심적인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지금껏 식민주의적인 사고를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변화가 절실하다.


청자의 음악 탐구


이 밖에 주요 방송매체에서 강조되는 음악들은 우리의 보기보다 다층적인 존재를 반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내 앞에 쉽게 주어진 음악들을 향유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소비적 듣기와 자기 증명의 도구가 되는 취향과 애호의 듣기를 넘어서, 개별 적면서도 사회적이고 현재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탐구하려는 사람은 음악 듣기도 수행자처럼, 학자처럼 탐구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비 음악인이 실기를 하지 않고 어떻게 음악을 잘 들을 수 있을지, 실기자만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그런데 음악에 박학다식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철학을 갈고닦으며 자기 수양을 오래 하신 어르신이 난생처음 듣는 파격적인 나의 음악의 그 핵심을 정확히 들어주신 적이 있었다. 창작자로서는 더욱이 잊을 수 없는 이러한 음악적 교감은 자신의 취향과 기존에 구축한 지식에 메이지 않고 오로지 열린 영적 감각 및 온 존재를 열어둘 때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 어르신이 나의 음악에 공명한 이유는 내가 AACM의 음악에 반짝이는 영감으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과 비슷한 것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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