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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Nov 01. 2020

인간과 음악 (3)

통합된 자아와 분열된 자아

나는 “내가 누구인가”하는 스스로에게 물은 오래된 질문을 음악으로 풀어나가고 또 이루어나가고자 한다. 10대 시절에는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알 수가 없었다. 몇 해가 흘러서야, 이 질문은 오로지 나의 삶과 예술을 통해서 대답할 수 있고 그렇게 걸어 나가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조금 내려두고 크게 그 질문에 마음을 메어놓지 않은 채 내 앞에 주어진 공부를 해왔다. 때가 되니 돌아돌아 다양한 맥락에 놓였던 나란 존재가 점차 하나하나 통합이 되기 시작되었다. 답이 점점 또렷해지고 답이 점점 삶 속에서 이뤄져 간다.


존재론적인 질문, 즉 음악이란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하는 경우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는 공리가 될 수 있는 명제, 즉 “갇힌 의미”를 담아낸 정의라는 형태로 대답하려는 경향이다. 나 또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떠한 절대적인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를 정의하려고 했기에 어린 시절 답을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이를 더 심화하여 살펴보면, ‘나’의 연결성과 전체와의 유기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답에 다가가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철저히 “외부”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접근으로 ‘나’의 성질을 분석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물 안에서 노니며 나름의 치열한 생존의 삶을 사는 물고기의 생태를 파악하지 않고, 죽은 물고기를 해체시켜 관찰한 것 만으로 물고기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나의 주변과 나의 관계에 의해 성질을 달리하는 가변성을 지녔다. 흔히 ‘케미’라고 하는 것처럼 시너지가 나는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 있게 되면 발현되는 나의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때와 매우 다른 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존재를 이해할 때에 시공이라는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내 존재를 관통하는 요소는 우주, 즉 시공이다. 두 번째 포인트였던 가변성도 이와 연관되어 있지만, 내가 더욱 주목한 것은 나의 현재가 하나의 집약된 결과물이라면 여기까지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온 내 몸의 세포 정보, 내 모국어가 세월과 수많은 인생들을 거쳐 형성한 집단의식을 내 의식에도 전해주고, 모국어 고유의 리듬과 발성 방법이 주는 특유의 신체 사용 방식, 현 사회의 부조리함과 조리함 모두의 발로가 되었던 역사 등. 현재 시공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를 함축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존재는 길어봐야 100년인 짧은 인생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내 개인이 사회와 역사, 뿌리가 되는 문화로부터 단절된 존재로 부유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의 존재의 범주를 넓혀서 연속체로서, 통합된 자아로 살고 싶었고 좁은 자아가 아닌 넓혀진 자아가 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내가 국악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전통음악 탐구

한국 전통음악 공부의 시작은 ‘개취’가 아니라 탐구심과 책임감이었다. 개인의 취향 너머로 국악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고, 낯선 언어와의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전혀 다른 층위의 나를 사용하는 국악연주 실습은 새로운 나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해가지 않는 타인을 존중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를 아는 지혜이다. ‘화성이 부족해’라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국악에 대한 경솔한 판단을 타분야의 음악 전공자로 부터 종종 발견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모든 의무교육까지 마친 나에게도 생경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었던 국악은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국악을 전공하지 않은 음악가로서 한국 전통 음악공부는 타자를 존중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 나의 본향인 한국문화와 역사, 결국 ‘나’를 존중하는 일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인 음악가라면 전통음악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언뜻 나의 이런 주장이 자국, 자민족의 우월감을 무분별하게 내세운다거나, 젊은 음악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묶어두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중심의 학술서, 그리고 서구적 시각으로 발전된 학술서가 대부분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가 밝히는 스스로의 학문이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현실에서 잘못된 우월감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나타난 열등의식의 동전의 반대면과 같을 뿐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자신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부재한 개인주의도 나오는 것이다. 개인을 물론 태어나서 살아온 그 나이 만큼의 범위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는 매우 확장된 존재라는 것, 즉, 내 시간과 내 세대 너머의 삶까지가 나의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개인취향에 불과한 감각적 예술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전통이라는 과거의 무게 뿐만 아니라 미래의 무게를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나의 세대에서 반감을 느끼는 그 “고루한” “전통”이라는 것은 사실 전통이 아닌 관습인 경우가 많다. 흐르는 성질의 전통이라면 웃세대는 아랫세대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충실하게 가르쳐 스스로 열매를 맺도록 해야할 것이다.


애초에 깊이 국악기와 음악을 전공자의 깊이로 배운 것이 아닌데 내가 얼마나 그 뿌리의 정신과 형식을 음악적으로 제대로 낼 수 있겠나. 다만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형태 이전의 원리를 근원으로 두루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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