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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Sep 30. 2020

창조 그리고 융합

전통의 자기 창조를 지지하며

융합, 그 개념의 맥락


융합이란 단어와 개념이 내 시선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즈음인 것 같다.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인 <통섭>이 출간되면서이다. 엄밀히 따지면서 융합과 통섭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융합을 논할 때 윌슨의 통섭의 개념이 포함이 되어서 일단은 동의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미국 보스턴에 유학하여 졸업을 하기 전까지는 학업에 정신이 없이 지내다가 조금의 여유를 찾은 10년 뒤 한국 뉴스를 보니 기업들을 중심으로 융합이 화두라고 난리였다. 융합의 가치를 충분히 공감한다.


근현대성 (모더니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 뿌리가 되는 사고의 체계를 살핀다면 ‘분分’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산업에서 두드러졌던 분업화는 물론, 학문 또한 점차 세세하게 분화되고 전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윌슨은 이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으로 각기 다른 학문 간의 불통을 꼽으면서 책 <통섭>에서 학제 간의 통합적인 연구를 행할 것을 진화생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한 것이었다.


90년대에도 이미 학제 간 연구는 진행 중이었다. 심심치 않게 Interdisciplinary 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복수전공이라면 각 전공을 따로따로 공부를 하겠지만 학제적 연구를 하는 것은 다른 전문분야의 지식이 상호작용을 이루면서 하나의 연구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을 융합이라 부를 수 있겠다. 한 가지의 프레임으로만 연구한 지식의 사각지대 blind spot를 다른 분야의 시각으로 보완하여 새로운 지식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훌륭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의 분화가 심화되며 오히려 힘을 잃은 지식체계의 문제를, 즉 학문에서의 근현대성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윌슨의 통섭은 이미 지나가고 있는 패러다임의 다음을 선포한 것에 다름 아니다. 2020년인 지금은 통섭이 한국에 출간된 때와도 격차가 많이 벌어진, 완전히 다른 세상에 진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팬데믹이 촉진제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일어난 현재와 변화하는 세계를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역할도 했다. 크게 구획된 필드에서도 매우 세분화된 ‘전문’을 신봉하는 일은 낡은 신화 같다. 매우 일상적인 삶, 먹고사는 일에서부터 이제는 하나의 전문적인 일 만을 해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때가 왔고 실제로 개인이 기업화되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주력 분야’들’과 보완이 되는 다른 분야의 지식을 두루 섭력하여 자신의 프로젝트를 해 나갈 수밖에 없어졌다.



냉정한 인간동물의 세계 그리고 예술


언제나 그래 왔듯이 세상은 달라진다. 옛 시인들이 읊조리던 그 무상함은 한때 찬란한 권세를 누리던 제국이 황량한 사막의 모래처럼 부서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보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딱히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비관적인 현실과 매우 냉정한 힘의 논리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 힘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바람처럼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하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약육강식의 현실을 뛰어넘은 가치들을 추구하게 된다. 물론 겉으로는 그러한 가치를 표방하지만 광기에 가까운 선동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는 이들도 있다.


바른 앎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정밀한 공부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이상만을 붙들어서도 안된다. 이데올로기라는 허상이 어떻게 인간 스스로를 속고 속이게 하는지 간파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동시에 냉정함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런 인류의 어리석음은 어찌 극복할 수 있는지 막막하다. 영영 인간은 어리석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초월하려는 노력들, 과거에 나타난 여러 성인들의 노력이 모여서 그나마 자멸을 면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깨달음을 사실은 조금 늦게 얻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권력과 전쟁을 뼈대로 쓰인 역사책을 보면서 힘들어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권력과 전쟁이라는 두 축이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야만적인 세상에 태어났다니!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고 물리법칙과 함께한다. 결국엔 인간 본성의 여러 층위를 조금씩 알아차리면서 “야만적인” 인류 역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장황하게 인류 역사의 흐름과 현실을 말한 것은 한민족의 역사를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함이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완전히, 온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토록 극악무도했던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식민 과거를 완벽하게 청산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세계대전 이후 정립된 또 다른 세계의 헤게모니 다툼에 휘말려 들어가 (6.25)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고 오로지 “생존”에 온 힘을 다 하여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지배 정신이 살아있고, ‘열강’이 뻗어놓은 질서가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더군다나 후자는 선과 악의 구도로 보면 쉽게 보이지 않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문명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국제정치적으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원폭 투하로 한국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뤘다. 서구 문명은 가까운 현대사 안에서 볼 때 우리에게 ‘선’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서양문명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을 감행하던 시절부터 세워놓은 질서와 체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식민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 틀 중 하나가 교육과 학문일 것이다. 예컨대 서양 전통음악, 즉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을 기반으로 음악을 연구하는 학문을 음악학 musicology라고 하고 그 외의 민족들에게서 발생한 음악은 민속음악학 ethnomusicology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연구를 한다. 여기서 서양 전통음악이라고 내가 지칭하는 음악은 물론 유럽지역의 민속음악인 캘틱이라던지 집시음악은 모두 포함되지 않는다. 중세의 그레고리 성가를 시작으로 그 흐름이 이어져 시대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해온 음악을 특정한다.


내가 유학을 포함해서 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미국 보스턴에는 하버드, MIT를 비롯해서 세계 유수 대학이 많다. 그중 하버드 대학교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구경한 적이 있다. 음악가이다 보니 당연히 음악 섹션을 찾아보았다. “음악 포획하기: 기보법 이야기 (Capturing Music: The Story of Notation)”이라는 책이 있었다. 히스토리가 아닌 스토리. 학술적이기보다는 일반인에게 교양도서로 다가가는 듯한 제목을 보았을 때 충분히 인기를 끌만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감도 잠시, 그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중세 유럽 음악과 그 계통으로 이어져온 음악 기보법의 역사만 담겨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국악학자가 우리나라 전통음악 기보법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쓴다 했을 때, 전통 기보법인 정간보를 특정하거나 국악의 기보법 내지는 한국 전통음악의 기보법 정도로 표현하지 보편적인 상위 개념인 기보법 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국외는 그렇다 할지라도 국내에서 조차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 문명과 문화가 근현대사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탄식할만한 것은, 지금의 교과과정은 다르겠지만, 공교육 음악교과과정을 거치며 물론 서양 기보법으로 어색하게 표현된 민요와 장단을 배우기는 했으나 판소리 명창 이름도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국악의 다소 빈약했던 학문적 연구 기반도 한몫을 했겠지만, 바흐 음악의 아버지라 배우고 헨델음악의 어머니라 배우며 자라난 나의 음악적 세계관은 그야말로 뿌리 없는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대학교 (및 초중고 학교의) 학문의 기틀을 세운 주체가 누구인가요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에피소드들이다. 음악의 학문적 구분으로 돌아와서, 민속음악학은 헤게모니를 쥔 권력의 주체가 아닌 식민 건설의 대상이 되어온 ‘타자’의 음악을 통칭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틀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또는 받아들인 채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식민 사상을 지녔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깔아놓은 판이 이미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런 학제 기관이 고정적으로 틀로 정해놓은 것이더라도 비판적인 인식을 반드시 갖아야 한다. 특히 이미 타자화 된 쪽인 한국인은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에 저항적이어야 한다.



전통의 자기 창조를 지지한다.


마치 대중적이지 않은, 그래서 가난한(?) 전통예술의 ‘먹고 살길’은 바로 융합이라는 식의 들뜬 마음들을 보아왔다. 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박제된 전통예술을 받들고 앵무새처럼 지나간 세대를 반복하는 것도 맞지 않다. 전통은 그 본래의 뜻이 ‘흐름’을 내포한다. 흐름은 세대에 따라 계속 새로워짐을 의미한다. 두 가지의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화학적인 반응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탄생한다는 의미의 융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전 세대로부터 전해진 문화가 고정된 실체로 보존 보전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전통은 자기 창조이다.


자기 창조를 하는 모든 생명은 특정한 구조를 반복하여 생장하는 개성적 프로토콜이 있기 마련이다. 해바라기 씨앗 안에는 그 씨가 심겨 뿌리를 내려 자라날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지만 해바라기 만의 모습을 드러낼 공식과도 같은 DNA가 꼬깃꼬깃 알뜰하게 담겨있다. 종 species 내의 DNA 보편성도 있지만 객체의 특수성도 당연히 있다. 생물학적인 존재로서의 한 인간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영혼’ 또는 ‘의식’으로서의 존재도 또 다른 자기 창조를 이끌어낼 요소로 작용할 것이고, 이 또한 그만의 패턴이나 개성이 존재한다.


우리의 전통예술을 한 개성적 객체로 바라보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과 500년 남짓인 신생국가인 미국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그 시간은 체험적으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나마도 자력과 타력으로 잊혔기에 어쩌면 전통예술 자체가 정신은 꿈결처럼 사라지고 형식만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국악의 경우만 보아도, 너무나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지만, 국악이 그런 모습을 띄게 된 이유, 그 철학적 물리적 바탕을 속 시원하게 체계적으로 알아 이야기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것이야 말로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음악 연주 이외의 공부를 독려하지 못한 학교 시스템의 폐해일 런지도 모른다.


자기 창조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러 층위에서 살펴 아는 데에서 시작이 된다. 그런 자신이 자신만의 격물치지(관찰로 이르는 앎)와 감각적 체험을 두루 아울러서 자신만의 예술을 닦아 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 창조일 것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100년이 안 되는 짧은 한 인간의 일반적인 수명 life span이 위치한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니, 자신이 얼마나 창의적인 들 선조와 후대를 잇는 ‘덧음’에 지날 뿐이라는 겸손한 마음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기 창조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융합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멋이 충만할 것 같다.


한편으론, 그저 은은하게 드러나 특별히 더욱 새롭지도 않은 듯 한 전통예술 속에서 들을 줄 아는 귀, ‘귀명창'에만 들리는 파격을 꿈꾸게 되기도 하다. 내가 보아온 우리 예술은 자연과 주변과의 어우러짐을 추구하고,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순진무구하여 투박하거나 단순해 보이는 모습도 있다. 나무의 향을 고려하고 본연의 결을 살려 탄생한 목공예품은 오래도록 만지고 닦아가며, 그렇게 세월을 들여 늘 새로워진다. 청아하고 맑은 소리보다도 곰삭은 성음을 가치롭게 여기는 것, 빠른 출세와 성공보다는 세월을 지키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다 할 때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득음을 추구하는 것, 모두 그와 같은 삶에 대한 순박하면서도 숭고한 태도이다. 그래서 내게는 우리 국악을 소재로 하여 쉬이 인위적인 융합을 시도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닦고 또 닦여서 있는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존재로 그 온전함을 완성시키는 길이 더 멋져 보인다. 잊힌 옛 물건에서 조상의 지혜를 발견하듯 우리 전통음악에 서린 깊은 지혜와 혜안이 오히려 미래에 필요한 우리 자신과 인류의 자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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