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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Nov 01. 2020

주객의 경계를 넘어 듣고 쓰기

단단하고 독립적인 물질체라는 환영


음악 학습, 그리고 피아노가 아주 처음인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연속성으로 덩어리 진 아이의 소리 경험에 구분선을 지어주는 일이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의 몸, 즉 자신의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른손-왼손. 의외로 글자 연습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보고 따라 쓰는 글자를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다. 알파벳의 D라고 한다면 ‘배가 볼록한’ 부분이 왼쪽으로 가도록 쓴다. 방향을 구분하여 인지하는 학습이 가장 기본인 셈이다. 이후에는 양손의 다섯 손가락에 번호를 붙여주고, 그다음엔 높은 소리-낮은 소리를 구분하는 연습, 큰 소리-작은 소리를 구분하는 연습, 그리고 빠름-느림을 구분하는 것인데, 속도 (템포)를 소리의 크기 (셈여림)과 결부시키는 경우도 꽤 있다.


지식 교육은 언어 그 자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듯하다. 언어는 구분 없이 경험되는 세계에 구획을 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근현대의 교육은 서구적 학문체계에 영향을 받아 다른 방식으로 작은 단위의 정보를 시작으로 연역적으로 지식을 확장하여 더 나은 앎으로 나아간다고 믿는다. 반대로 동양은 전통적으로 우주, 즉 가장 큰 단위에서 시작한다. 천자문만 보더라도 내가 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관찰 가능한 하늘과 땅을 상하로 구분하고, 공간인 ‘우’와 시간인 ‘주’로 운동하여 일정한 리듬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기본 틀을 시원시원하게 그려 놓는다.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나를 알며, 천체 운동의 리듬이 만들어낸 지구 중심의 시간 속 변화무쌍한 세상을 인지하게 된다.


이렇듯 공부는 언어를 통한 구분 짓기에서 시작된다.


음양이라는 양극의 힘의 작용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동양의 전통이다. 다만 음과 양은 상호의존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지 주와 객의 독립적 존재로서의 구분은 아니다. 단일한 물질인 물의 온도가 높기도 낮기도 한 것이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의 각 이질적인 물질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미국 동부 지역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는 옛 영국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가 따로 있는 곳이 있다. (옛 수도 시설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니라면) 이는 온수와 냉수를 다른 존재로 구분하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은 단 하나의 수도꼭지를 수압은 상하로, 수온은 좌우로 조절하여 단지 양극의 온도가 아니라 범위 내의 모든 온도로 물을 틀 수가 있다. 음양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에너지(물)의 다른 모습(온-냉)인 것이다. 낮과 밤도, 여름과 겨울도 그렇다.


양자역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객체의 실재가 주체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류가 지구의 중력장 안에서 살면서 태양과 태양계의 행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인간이라는 관찰자가 객체를 얼마나 ‘객관적인’ 실재적 실체로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구에 사는 인간으로서 관찰하는 우주를 절대적인 가치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매우 허황된 것이 아닐까? 동양에서는 애초에 이를 상관관계로 보았다. 우주가 내가 서있는 바로 이 곳에서 나의 위치와 몸으로 경험하는 실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나라는 주체가 바라보고 경험하는 객체가 또 하나의 주체로서 또 다른 객체인 나에게 작용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음악이라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 그 악기를 주로 연주하기에 피아노라는 악기 주체이자 객체인 존재에 의해 말 그대로 ‘형성’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객의 경계를 넘어서

그러나 우리가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할 때, 또 한 아티스트의 음반에 대한 글을 쓸 때 — 그것이 평론이든 감상문이든 아니면 기본적인 정보만을 담은 소개글이든, 음악은 단단하고 독립적인 객체가 된다. 마치 눈 앞에 있는 사과 한 알의 이모저모를 분석하듯, 이 음악은 ‘둥근 형태에 철이 되지 않아 덜 익어 빨갛고 푸른색이 섞여있으나 의외로 당도는 높다. 아마도 원산지의 기후적 특성이 반영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듯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물론 청자로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가치판단에 기울어진 글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주객의 경계를 두며 글 쓰는 이가 어떤 절대적 판단을 하는 듯한 평론은 음악 향유의 현실과 괴리가 있어 보인다. 모든 관찰은, 그리고 모든 경험은 경험의 주체의 위치와 의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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