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세계 사교육 1번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대치동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해서 다양하게 피할 방법을 강구해 왔는데 결과가 이렇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는 아직까진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씩씩하게 다녀주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기 전날 밤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아 할 것 같던 남편에게도 위경련 증상이 있었다고 하니.. 작은 아이들의 첫 발걸음 뒤에는 정말 많은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나에겐, 그런 부정적 감정이 남들보다 클 것이다. 왜냐하면.. 1. 나와 아이는 대치동키즈의 삶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발도르프 학교나 시골 초등학교를 생각했었고, 적어도 혁신초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 반대의 꼭짓점에 있는 대치동 키즈의 삶에 입문하다니.. 사람 일 참 모른다. 2. 나는 학교에 적응 못했던 과거를 가진 부모다.
첫째 아이가 5살 때쯤부터인 것 같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웠던 과거의 사건이 자꾸만 떠올랐다. 국민학교 2, 3학년을 연속으로 한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사람에게 아마도 2학년 때 심하게 맞았던 적이 있다. 하굣길이라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고, 선생님은 나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교실 안에 있는 아이들까지 창문에 매달려 맞고 있는 나를 구경했다. 이 일을 떠올리며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멍든 마음이 씻겨나갈까?
그런데 이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일 뿐, 나의 학창 시절이 이때만 안 좋았던 건 아니다. 그리고 슬펐던 기억은 날 이렇게 사지로 몰아넣은 부모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나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다. 생일이 빠르지도 않은데 7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파는 것 중 가장 작은 체육복을 샀지만, 그마저 나에게는 탈춤을 춰야 할 듯 컸다.
하지만 한 살 어리다고 다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닐 거다. 사회에 나와서 나와 같은 케이스를 몇 번 만났는데, 그들은 같은 학년에서 한 살이 어림을 기분 좋게 얘기했고, 나처럼 인간관계가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흔한 빠른 년생 사람들도 대부분 잘 지낸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모양이었을까? 나는 그동안 내가 못난 탓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자존감이 낮았고, 낮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감도 당연히 없다.
하지만, 일곱 살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냈음을 사십이 넘어서 깨달았다. 내 아이는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에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러 간다. 차에 치일까 봐, 아니면 외롭기라도 할까 봐 혼자 보내는 건 상상을 못 하겠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굽이굽이 아이 걸음으로 30분이 걸리는 길을 입학 후 처음 한 번만 엄마랑 갔고, 엄마 등쌀에 밀린 오빠랑 몇 번 가봤고, 나머지는 혼자 다녔다. 당연히 그러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남편은 입학 후 6개월 동안 엄마랑 다녔고, 2학년까지 엄마가 데려다줬다는 지인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한 번 같이 가줬는데?”했더니 ”완전 내던져졌구나.“ 한다. 그땐 사물함도 없어서 매일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고쳐서도 매보고 손에도 들어보고 했다. 소변도 잘 가리지 못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종종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곤 했다. 아빠의 “학교에서 미리 싸고 와야지” 하는 조언이 허공에 흩어졌다. 마렵지 않은 소변을 미리 눈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우산을 챙겨주지 않았다. 등교 때 비가 오면 집으로 허겁지겁 돌아와 우산을 챙기면 되었지만, 하교 때 비가 오면 낭패였다.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서 있는 부모님들 사이에 나의 엄마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있을까..? 하며 엄마를 찾는 눈의 실낱같은 희망은 언제나 실망으로 끝났다. 딱 한 번 비 오는 날 엄마가 차를 타고 데리러 와주신 적이 있다. 그날의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아프다. 그리고 중학교 때 딱 한 번 우산을 챙겨주신 적이 있다. 신이 나서 학교에 있는 내내 “비야 어서 와라~와라~“ 했는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나만 우산을 가져왔고 비는 오지 않다.
도시락 싸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는데, 반찬이 부실해도 평소에는 친구들 걸 같이 먹으면 되었지만(가끔 불만을 표현하는 아이도 있었다.) 소풍 때는 직접 지하상가에 들러 김밥을 사갔다. 2학년 2학기였던가? 학교에서 먹는 첫 도시락이라 모두가 신나 할 때도 나는 시장 김밥을 꺼내 먹었다. 그때 그 나를 때린 그 선생님이 자상한 투로 ”김밥 싸왔어?“ 했는데, 그 말을 의미는 위로였을까? 동정이었을까? 혹시 비웃음이었을까?
엄마는 아침에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아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옷도 꾀제제 했다. 6학년 운동회 때는 오지도 않으셨다. 삼삼오오 가족끼리 돗자리를 깔고 소풍 도시락을 먹을 때 나는 혼자서 배회하다 친구 엄마의 구원으로 그나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떻게 자식에게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는지, 혼자 남겨진 아이의 마음이 그려지진 않는지, 참 이해가 안 된다. 자식 낳아보니 더 모르겠다. 그래도 밥은 차려 주셨고 머리는 매일 묶어주셨다. 그게 어딘가 싶다.
한글은 떼지 못하고 들어갔다. 받아쓰기 빵점도 받아봤다.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을 맞을 때도 많았다. 시험을 보면 올백 맞는 아이도 있고 다섯 개만 틀려도 많이 틀렸다 하는데 나는 열개가 넘게 틀렸다. 글씨는 개발새발이어서 그 흔한 글짓기상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서가 불안했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부모님께 혼난다는 건 매를 맞는 거였는데, 뭘 잘못해서 혼났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냥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위로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다 울고 나서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나가면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힘들다는 토로를 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2학년이 되자 갑자기 어려워지는 학습 난이도에 놀라 “왜 이래?” 물어보기도 했고, 학교 가기 싫다고도 해봤다. “엄마는 일기 예보를 안 봐?” 물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혼나는 게 두려워서였을까? 말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아서였을까? 그렇게 감정은 점점 메말라가고 표정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남들 다 우는 데 울지 않고 다 웃는데 웃지 않는 아이. 화날만한 상황에 화도 안 내고,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 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5살 터울 오빠는 보이스카웃을 했고, 남들도 아람단이며 우주소년단이며, 신나게 하는데, 나는 엄마에게 걸스카웃을 안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걸스카우트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그땐 그게 진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너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용이 많이 드는 걸스카웃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먼저 읽어 버리고 내 욕망은 저 깊이 박아 넣은 것일 수도 있고, ’ 나 같은 게 무슨 걸스카웃이야.‘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또 6학년 올라가서는 1학년때 매던 낡은 책가방을 꺼내서 다시 맸다.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면 칭찬받을 줄 알았던 걸까? 그렇게 나는 점점 욕망은 없고 책임감만 가득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엄마는 조기 교육에 열정을 보이셨다. 3학년때 했던 아이큐 검사 수치가 생각보다 너무 높게 나와서 나를 때렸던 그 선생님이 놀란 나머지 엄마를 호출했던 것이다. 내 성적은 약 50명의 아이 중 뒤에서 몇 번째였고, 그 선생님은 내가 결손 가정 아이인 줄 아셨다고 했다. (그러니까 쉽게 손을 댔다보다.) 암튼 그때부터 나는 사교육의 늪에 빠져 원조 선행학습을 했다.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 하는 아이와 함께 중학교 수학을 배웠고, 대입 미술학원, 성인 미술학원을 다녔고, 교포 출신 아이들과 함께 영어 회화를 배웠고, 고등학생들 반에서 한문을 배웠고, 5학년때 6학년과 함께 수학 영어를 배웠고, 심지어 성인들이 다니는 연기 학원도 다녀봤다. 엄마는 참 지독하게도 나를 한 단계 위에 올려놓으려고 발버둥을 치신 것 같다. 당연히 나는 어디서나 늘 열등한 아이였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1학년때 첫 담임을 맡아주신 이희복 선생님, 지금도 성함이 기억난다. 그분께서는 짝꿍이랑 지우개 때문에 울며불며 싸우는 나를 조용히 데려가 마음을 달래주셨고, 잎사귀 색칠을 잘했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해주시기도 했다. 준비물을 안 챙겨 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고, 2학년이 되어 헤어지고 난 후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쳤을 때 신이 나서 달려가면 품에 쏙 안아주셨다. 이희복 선생님 같은 분을 계속 만났다면..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차마 이름은 못 밝히겠는, 어이없게도 동시 쓰는 작가이기도 한 그분을 안 만났다면 좀 나았으려나..
트라우마 심한 초등학교 학부모는 하루하루가 두려움이다. 나의 학교 생활이 어떠하였건 가정에서 따듯한 돌봄을 받지 못했던 아이의 현재가 건강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 같다.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가며 살아갈 아이를 어떻게 지켜줘야 하는지 어떻게 용기를 줄 수 있는지 전혀 방법을 모른다. 대치동의 경쟁이 두렵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다. 뿌리 깊은 우울감이 기본 정서인 엄마를 만난 아이에게 미안하고, 어쩌면 나의 과거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지 모를 아이가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