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
노루와의 애프터는 심심하게도 커피집이었다.
나는 다를 것 없는 애프터를 당연하게 여기곤 지루한 야근에 몸을 싣고 늘어지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슴씨 혹시 괜찮으면 간단하게 술은 어떠세요?
이 지루한 저녁을 깨 준 노루의 한마디에 도파민이 펑- 터져 축 늘어질 퇴근길은 신나는 비단길이 돼주었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추레하지만 예쁜 게 얼마나 까다로운 OOTD인지!
지금 나의 턱 끝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을 최대한 가리되 얼굴은 화장을 안 고친 듯 내 윤광인 것처럼 빛이 유들유들 뿜어 나와야 한다. 옷은 후디하게 걸치며 내추럴한 모습이지만 내 핏이 드러나는 적당한 감각의 코디를 해야 한다..!
노루는 모를 것이다. 내가 이 꾸안꾸 메이크업과 패션에 열을 올리고 허겁지겁 닭발집으로 발길을 재촉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박시한 후드티의 모자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노루의 얼굴이 더욱 작아 보였다.
노루는 첫 만남 때 보였던 어설픔이나 떨림은 없어 보였다. 차분해진 노루의 페이스를 보니 지난번 모습과 대조되어서인지 내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노루는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째서인지 마음이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더욱 꼿꼿이 자세를 고쳐 잡았으나 그 모습이 더 부 자연스러워 보여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빨간 닭발이 우리 앞에 놓이고, 음식의 열기가 나의 열기를 빨아들이듯 조금 편안해졌다. 긴장이 풀린 나는 노루와 소맥을 한 잔, 두 잔 기울이며 천천히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술잔을 5잔쯤 기울였을 때, 노루의 가정사를 들을 수 있었다.
노루 역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아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 후, 비틀비틀 청소년기를 보냈을 그의 역사가 술잔을 통해 넘실넘실 그려졌다. 결국 군대 제대 후엔 새 아버님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 없어 자신의 발로 혼자의 삶을 선택했던 그였다.
그 후 노루는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명절마다, 빨간 날마다, 생일에도 홀로 지냈다고 한다. 홀로 자립하여 일자리도 스스로 구하고 여태껏 이만큼 쌓아 올려 살아온 노루의 인생은 나보다 외롭고 고독했으리라는 마음의 울림이 퍼졌다.
아 저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어요!
무거운 분위기를 깨는 한 마디를 훅 던졌다. 노루의 손등을 살짝 잡으며 웃음을 날려주자 노루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게도 앞전의 사람은 오랫동안 화장실을 비워주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그를 더 재촉하며 말했다.
밖에 공중화장실이라도 같이 좀 찾아줄래요?
노루는 급하다는 나의 안달에 같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취기가 올랐다는 이유로 살짝 헤롱거리는 내 모습에 난처해하면서도 상대가 급할까 봐 열심히 찾아봐주는 모습이 귀엽고 상냥했다. 노루는 내 손을 잡았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의 손을 꼭 잡은 애프터의 시간은 서로를 의지하고, 달래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말을 놓았다.
그와 나는 공교롭게도 생일도 이틀 차이에 지나지 않았기에 서로 간의 래포가 빨리 형성되었다.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큰 우리는 여러 가지 자라온 이야기와 공감대로 더 가깝게 친해질 수 있었다.
노루나 나나 명절에 갈 집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루는 특별한 계획이 없어 보였다. 헬스를 좋아하는 나름 '헬창'이었기 때문에 헬스장 말고는 갈 데 없는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밀고 당기기가 이미 시작된 우리 사이에서 먼저 데이트 신청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홀연히 대천 바다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방을 무턱대고 잡았다. 설날 전 날 '혼자 놀러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훌쩍 출발했다.
노루는 나의 피크닉을 썩 반기지 않는 듯이 보였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노루가 만나자고 하기를 은근히, 아니 대놓고 바랬다. 하지만 설날에 서로 만나자 하는 거, 너무 뻔한 전개 아닌가! 밤이 되도록 우리는 빙빙 문자만을 나누며 시간만 먹어댔다. 그렇게 밤이 되자 노루는 주선자 지인을 만나고 와서 약간의 취기를 가지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에 취한 노루는 이런저런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도, 나도 못 알아듣는 새벽의 전화질에 뭉개진 마음이 웃음으로 펴지는 듯했다. 나는 주워 담지도 못하는 노루의 생쇼를 직관하며 드디어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노루야, 내일 바다 보러 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