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다리기의 결말
살을 에는 추위에도 한달음에 달려온 건 외로움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나처럼 노루도 사실은 함께 설날 아침해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술이 깬 아침 그의 모습은 민망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함께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해수욕장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도 노루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듯 먼 산을 보거나 짧은 답을 주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 다시금 혼란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답답한 전개에 실마리를 준 것은 어느 카페에 다다라서였다. 우리는 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사실 내입장에선 기가 막힌 대화였다.
(대화 중간을 살펴보자)
노루: 네가 어떤 여자인지 좀 더 알고 싶어. 무턱대고 사랑할 순 없잖아?
사슴: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니까 바다에 와 준 거 아니야?
사슴: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어째서?
노루: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나는 그냥 너란 사람이 사랑해도 괜찮은 사람인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네가 사람들과 친목모임 하나가 있다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걸려. 다른 것은 모르겠고 서로 무턱대고 사랑하다가 상처받으면 어떡해?
사슴: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친목모임을 가지고 벌써 걱정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모임을 들어본 건 맞지만 네가 싫다면 그것도 안 할 거야. 이미 친목모임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란 사람이 마음에 걸리는 거니?
노루: 마음이 생기려면 너를 좀 더 겪어보고 싶은 것뿐이야.
노루: (...)
대략 이런 대화 속에서 흥분한 나는 노루에게 내 개똥철학을 찬란하게 연설하기 바빴다. 노루의 사랑의 '순서'라는 것에 대해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득했다. 사랑은 상대와 알아가며 자연히 피어오르는 자연과도 같은 것, 그 현상을 인정하자고. 그럼에도 서로가 한 길을 갈 수 없다면 마음의 열기를 누르고 각자 길을 가는 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통의 특권이라고. 1시간 정도의 설전 끝에 자리를 나오고 각자의 차량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웬일인지 노루는 본격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내 개똥철학이 노루에게 들어 먹힌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는 채 끈적해진 노루가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딱히 싫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직진에 약간의 경계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은 노루가 술을 마신 날이었다. 애정표현이 담긴 이모티콘을 계속 보내다 토라진 노루가 귀엽게 느껴지지 않은 날이었다.
사슴: 왜 자꾸 그래? 술 먹어서 그러는 거야? 빨리 자
노루: (토라짐) 에이 진짜, 됐다.
사슴: 말 예쁘게 안 할래?
갑자기 바뀐 노루의 태도에 피어난 의문이 극에 치달은 날이었다. 나 역시 사랑의 겁쟁이였기에 노루의 변화에 마냥 온건한 마음이 아니었다. 노루 역시 굳어버린 나의 스탠스에 똑같은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그렇게 둘 다 출렁다리에 놓인 중증멀미환자처럼 모든 것이 헷갈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다음 날 대화로 풀어보기로 한 우리는 저녁 5시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쩌면 이번 마지막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했다. 사랑을 바라보는 시야가 다른 우리. 어쩌면 맞춰가기 어렵겠다는 어두운 예감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지막일 수 있는 그 자리에 나서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꾸몄다. 적당히 꾸민 게 제일 예쁜 나이기에 만약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면 노루가 아쉽겠다고 생각할 만큼의 꾸밈을 했다.
만반의 무장을 한 뒤 먼저 카페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있었다. 오로지 예뻐 보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0분 뒤 노루가 들어왔다. 평범한 누빔 점퍼에 초록색 체크 셔츠, 청바지차림의 단정한 모습을 한 노루는 살짝 미소를 띤 채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모든 아집과 고집, 현재의 내 모습마저 머리에서 지워진 채 머리가 띵해지는 경험을 했다. 오로지 한 문장이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아아, 지독한 얼빠인 것인가? 나는!
내가 누누이 노루에게 얘기했던 사랑의 개똥철학에 철저하게 들어맞게 이미 노루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래. 노루가 말한 것처럼 우리 서로 다를지라도, 안전하지 못한 인연이라 돌아설지언정 지금 나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와 외로움을 나누며 함께 충만해지는 감정을 느낀 이상 나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싸웠는데, 이렇게 쉽게 풀린다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사랑의 줄다리기 같은 건 질색인 내가 미묘한 신경전을 끝내고 yes or no로 판가름 내는 지금 이 순간, 그는 너무 완벽하게 yes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우리는 대화 몇 마디에 가시 돋은 경계심이 풀릴 사이... 그것이 우리 사이였다.
노루도 사랑의 철학에 동화되었던 걸까?
본인 역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바보같이 20분의 대화가 지나가기 무섭게 화합의 장을 열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오해로 쌓인 서운함을 가볍게 풀어내고 카페를 함께 나왔다.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나의 한 마디에 노루가 yes로 응수했다. 2월의 꽃눈이 내린 지면을 걸어 나갈 때 휘청, 나는 노루의 손을 잡았다. 그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스며들었다.
설날이 지나가니 노루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극적 화해(?)의 날 이후로 매일 만났다. 일상을 나누고, 밥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안아주며 따뜻한 겨울의 향연을 펼쳤다. 노루의 생일날 역시 당연히 우리의 의미를 담는 날이었다. 생일에 항상 혼자였다는 그를 위해 맞춤케이크를 준비했다. 그에게 생일케이크 초를 부는 시간,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를 보내는 따뜻함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곁이 필요한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그에게 케이크와 함께 선물한 내 마음이었다.
노루는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으로 화답했다. 나는 달콤한 선물로도 충분했다. 빌렌타인 데이 다음 날인 내 생일에 뭔가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틀 차이인 생일에 서로 하나씩 사이좋게 챙겨주는 것도 좋지만 내심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부끄럽기도 했다. 노루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노루는 더 큰 선물을 준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