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제2의 화살을 피하는 법

by 정희

요즘 기분이 많이 좋지 않다. 원래 텐션이 높은 편이라 쉽게 우울해하지 않는 내가, 요즘은 활력이 사라져 만사가 귀찮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날이 짧아진 탓도 있고, 잘 나가던 주식이 조정을 받은 탓도 있다. 그러던 차에 냉장고까지 고장이 났다.

코스트코에서 사다 쟁여둔 고기며 치즈며 바질 페스토, 각종 견과류. 냉장실과 냉동실의 든든한 재산이었던 것들이 하나씩 버려지는 걸 보면서 나는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이론으로는 서둘러 요리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하기가 싫었다. 괜히 화만 났다.


그렇게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다 문득, 시들해져 가는 채소들이 마치 축 처진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두면 식재료와 함께 내 마음도 썩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냉장고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까워 묵혀뒀던 것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부처님 말씀 중 '제1의 화살은 맞을지라도, 제2의 화살은 맞지 말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냉장고가 고장 난 건 피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아까워하며 무력감에 빠져있는 건 나답지 않았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냉장고를 자주 고장 내셨다. 나는 그때마다 놀렸다. 식재료를 너무 많이 넣어서 순환이 안 되는 거라고, 좀 잘 쓰라고.


그러던 내가 이제 냉장고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식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엄마 다 컸네. 철들었어."

이번에는 딸이 나를 놀린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