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기억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내 굴라시를 망쳤던 캐러웨이 시드가 세상에서 가장 고집스러운 향신료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잘못은 향신료에게 없었다.
단지 굴라시라는 음식과 캐러웨이 시드라는 재료의 궁합, 그리고 나의 입맛이 맞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정통의 맛을 최고의 풍미라며 반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 취향의 섬 밖에서 길을 잃었던 셈이다.
찬장 구석에 밀어두었던 캐러웨이 시드를 다시 꺼냈다. 버릴 요량으로 뚜껑을 열었으나, 코끝에 닿은 향기는 의외로 상큼했다. 페퍼민트처럼 화하고 시원한 그 향기를 다시 맡으니, 무작정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신료라는 존재는 참으로 묘하다. 어떤 재료를 만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침입자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감초가 되기도 한다. 굴라시의 무겁고 붉은 국물 속에서는 익숙한 감칠맛을 방해하던 존재였지만, 찾아보니 이 씨앗은 생각보다 훨씬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호밀빵 특유의 향긋한 풍미가 바로 이 씨앗에서 온다는 것, 양배추나 고기의 잡내를 잡는 데도 쓰인다는 것. 무거운 국물보다는 가벼운 빵이나 투명한 찻잔 속이 더 어울리는 성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 낯설었던 향기가 찻잔 속에서는 다정한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캐러웨이 시드를 따뜻한 물에 우려내 보았다. 차를 한 모금 머금어 본다. 청량함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내 입맛에는 낯설고 서먹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존재를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 존재의 이유를 부정할 권리 또한 내게 없음을 안다. 이 향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해한다는 것이 곧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비록 내 취향의 맛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이질감을 온전히 감각해 본 것만으로도 이 차 한 잔의 소임은 다한 셈이다. 언젠가 수육을 할 때 꺼내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씨앗들은 아직 선반 위에 남겨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