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근 서리와 비로도 셔츠
초록색 비로도 셔츠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 토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우리 집은 지금의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바로 앞에 있었다. 5학년 무렵에는 집 앞에서 한창 1호선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먼지가 가득했지만, 나는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사장을 지켜봤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땅 깊은 곳까지 기차가 다니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그 시절 우리 모두 참 가난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사실을 잘 몰랐다. 훗날 생각해 보니 우리는 이른바 도시 빈민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이었다. 지붕은 루핑으로 덮여 있었고, 하수도는 길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노출된 하수도 주변에서 뛰어넘기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비가 많이 오면 지붕이 새는 일도 허다했다.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지붕에 비닐을 씌우셨고, 그래도 빗물이 새면 방 안에 그릇을 받쳐두고 살았다. 요즘 TV에서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보여줄 때면, 나도 저런 곳에 살았었지 하고 새삼 놀라곤 한다.
그래도 동대문은 도심이라 물은 잘 나왔다. 나중에 이사 간 미아리 산동네에서는 물장수에게 돈을 주고 생활용수를 사다 써야 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비참하거나 괴롭지 않았다. 너무 무지해서 그런가, 내 친구들도 다 그렇게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매일 노는 게 너무 즐거워 가난 따위는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걸까.
하루는 학교에서 지하철 1호선 공사에 보탠다며 고철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에 내놓을 고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민 끝에 사촌과 나는 근처 지하철 공사장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고, 거기서 철근 하나를 슬쩍해서 학교에 제출했다.
선생님께서도 "이거 혹시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져온 거 아니니?"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셨지만,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수거해 가셨다.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거리면서도 묘한 스릴과 재미를 느꼈던 그 순간이, 지금 생각하면 우리 모두 무언가에 굶주려 있고 순진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늘 골목에 모여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꼼꼬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저녁마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골목을 누비던 기억이 선하다.
하루는 어머니가 큰맘 먹고 값비싼 초록색 비로도 셔츠를 사주셨는데, 그걸 입고 나간 날 아이들과 오징어 게임을 하다가 그만 옷을 찢어 먹고 말았다. 어머니는 야단을 치면서도 옷을 꿰매주셨고, 나는 그 기운 옷을 다시 입고 또 밖으로 뛰어나갔다.
밤에 하는 술래잡기나 다방구는 낮보다 몇 배는 더 스릴 넘쳤다. 한 번은 숨을 곳을 찾아 어느 집 개집 속으로 기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개털과 냄새가 가득했지만 숨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숨죽이고 있었다. 다행히 개가 밖에 있어 물리지 않았고, 아이들이 나를 찾지 못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몸에 배어버린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집 앞 큰길은 지하철 공사로 온통 파헤쳐진 채 현대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집 뒤 골목은 사창가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국가의 거대한 미래와 소외된 이들의 고단한 일상이 한 길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린 우리는 그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지나다녔다. 내 친구들 중에도 부모님이 그 일에 종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편견 없이 그저 즐겁게 어울렸다.
그중 사창가에서 업소를 운영하던 친구의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유독 좋았다. 낮에는 어른들이 없어 우리에겐 최고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그 집에 모여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노래도 들으며 편하게 놀았다.
어머니는 내가 그 집에 가는 것을 엄히 금하셨지만, 나는 그저 내 친구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 집 딸이라며 어른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내 친구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 있을까.
세월이 흘러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동대문의 한 찻집을 찾았다. 그런데 도착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바로 내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던 그 집이었다.
과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세련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세련된 조명 아래 찻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다른 시간을 걷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친구와 나란히 앉아 게를 까먹던 그 마루에서 이제는 향기로운 차를 마신다.
동대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던 동대문 운동장은 거대한 DDP가 되었고, 어머니와 옷을 고르던 평화시장 주변은 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서 화려한 빌딩 숲이 되었다.
눈부신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허름하고 해가 잘 들지 않는 골목 하나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골목의 정취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차 향기 너머로, 공사장 흙먼지 속에서도 빛나던 나의 초록색 비로도 셔츠가 아련히 겹쳐 보였다.
그때 내가 지하철 공사장에서 슬쩍해 학교에 냈던 그 철근은, 아마 지금쯤 지하철 1호선의 어느 구간에서 든든한 기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이 비리는 이제 50여 년 전의 일이니 공소시효도 끝났으리라 믿으며 이 글을 쓴다.
이것은 그 시절, 가난했지만 노느라 바빴던 어린 날의 나에게 보내는 면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