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잔도 위의 공포, 그리고 묵묵히 익어가는 밀밭
올봄, 친구와 함께 중국의 태항산에 다녀왔다. 산시성, 허난성, 허베이성 등 3개 성에 걸쳐 약 400km나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으로, '동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다.
대자연의 경이로움뿐만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에 길을 낸 인간의 집념이 담긴 잔도까지 볼 수 있다.
처음으로 떠나는 중국 여행이라 설렘이 컸다. 비행기로 약 2시간을 날아 제남 공항에 내려서니 비로소 여행이 실감 났다. 다만 입국 심사는 몹시 까다로워,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만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 임주로 향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차창 밖 풍경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그곳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5시간 내내 창밖으로는 끝없는 평야가 이어졌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평지는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그 넓은 들판에는 벼 대신 밀이 가득했다. 우리나라와 위도는 비슷하지만, 대륙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이 이 지역을 건조하고 메마른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지역인 듯, 넓은 평야 곳곳에서는 기계 대신 손으로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긴 여정 끝에 도시에 들어서자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오토바이마다 핸들 쪽에 강렬한 원색의 꽃무늬와 기하학적 문양의 누비이불이 달려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당풍비'라고 부른다. 일반 외투만으로는 부족하니, 오토바이 자체에 이불을 씌워 움직이는 방한 장비를 만든 것이다.
투박한 오토바이와 화려한 문양의 누비이불이 조합된 모습이 묘하게 색달랐다. 우리나라 배달 라이더들의 핸들 토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포근해 보였다.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러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뜻밖의 작고 다정한 풍경이었다.
마침내 태항산의 본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생각하기에 태항산 여행의 백미는 잔도를 걷는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그 길의 일정 구간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유리 위에 발을 얹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났다. 투명한 유리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자연의 거대한 공백과 마주하는 그 순간, 당장이라도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바들바들 떨며 건넜다. 주변 사람들은 먼 곳을 보라고 했지만 그 무서움은 극복이 되지 않았다.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불투명한 콘크리트나 나무 잔도는 시야를 가로막지만, 유리는 풍경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장엄한 태항산의 규모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려는 설계.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을 주려는 의도였을까. 중국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듯, 자연의 거대함 속에 인간이 티끌처럼 섞여 드는 그 풍경을 발밑에서도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공포와 경이가 뒤섞인 채로, 나는 간신히 그 길을 건넜다.
태항 대협곡 내 오지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케이블카와 트레킹을 번갈아 가며 정상까지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앞서 내려가는 일행 두 명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을 따라갔고, 우리를 본 다른 일행들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여섯 명이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그런데 가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올라올 때 보았던 길이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그만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순간 또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태항산은 정말이지 깊고도 깊다. 겹겹이 쌓인 산맥의 능선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짙은 녹음이 일렁였고, 어둡고 육중한 위용으로 우리를 집어삼킬 듯 서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영화 〈쥐라기 공원〉 속 으스스한 숲처럼 느껴졌다.
'중국 여행 갔던 관광객 6명, 태항산 깊은 산속으로 사라지다.' 그런 타이틀이 머릿속을 스쳤다.
결국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 길을 잘못 들었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아래쪽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가이드는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찾아 나섰고, 사람들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우리는 마치 영웅담이라도 늘어놓듯, 하마터면 신문에 날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며칠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처음 도착했을 때 싱그러운 초록빛이던 밀밭이 어느덧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유리 잔도에서 벌벌 떨고 길을 잃어 허둥대는 동안에도, 밀은 묵묵히 익어갔던 것이다.
이 밀은 곧 이들의 주식인 국수와 빵, 만두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