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위도, 본능이 깨어나는 시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는 우리나라 백두산보다도 훨씬 북쪽에 위치해 있고, 캐나다 밴쿠버와 비슷한 위도에 자리 잡고 있다. 겨울에는 오후 4시경에 해가 지고, 여름에는 밤 9시가 넘어도 환한 백야에 가까운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여행을 간 계절은 겨울이었다. 오후 5시만 되어도 우리나라 겨울밤 9시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덕분에 해가 있는 동안 바삐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해가 지면 빨리 보금자리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초조함, 나는 그것이 오래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어둠이 내려앉아 시야가 좁아지면 포식자의 위협에 노출되기 쉬웠던 구석기시대부터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
젊은 시절에는 호기심과 흥이 그 두려움을 눌렀지만, 나이가 드니 본래의 감각이 더 선명하게 살아난다. 프라하의 겨울 오후, 그 초조함은 여느 때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래서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시청 앞 천문시계를 보고, 카를교를 건너고, 광장 한편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유럽은 어디를 가나 크건 작건 광장이 있어서 좋다.
중세에는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공동체의 유대가 싹텄을 그 공간.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상하게도 해외여행을 가면 스타벅스나 맥도널드 같은 익숙한 간판을 만날 때 괜스레 반가워진다. 낯선 땅에서 잠시 긴장을 내려놓게 해주는 작은 닻 같은 것이랄까.
그 한 잔 덕분에 비로소 여유가 생겼고, 그제야 광장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기념품 숍에 가득 걸린 마리오네트 인형들이 시선을 끌었다. 체코는 인형극의 역사가 깊은 나라답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 줄에 매달린 채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딸에게 하나 사다 주고 싶었다.
분명 조금 가지고 있다가 한구석에 둘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기념으로. 피노키오였는지 공주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인형 하나를 손에 들고 가게를 나왔다.
그 인형이 집안 어딘가에서 잊혀갈 무렵,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프라하의 기억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소환해 냈다.
핵전쟁 이후 물과 기름이 권력이 된 황폐한 미래. 거대한 전쟁 트럭 앞에 매달려 불을 뿜는 기타를 연주하던 두프 워리어.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조종당하는 기괴한 마리오네트 같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처절한 질주 속에서도 줄에 매달려 연주를 멈추지 않던 그 모습은, 영화의 기괴한 세계관을 완성하는 가장 참신한 상징이었다.
타오르는 사막의 이미지를 보며, 나는 역설적으로 프라하의 쌀쌀한 해 질 녘 광장에 줄에 매달려 있던 인형들을 떠올렸다.
기념품 숍을 나와 다시 마주한 프라하의 밤거리는 낮보다 더 화려한 불빛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해가 진 뒤의 초조함은 여전했지만, 코끝을 스치는 찬 공기와 손에 든 인형의 무게감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음을 실감 나게 했다.
여름의 긴 낮을 꿈 꾸며, 나는 겨울 프라하가 주는 긴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