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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제는 특정 이들에게 민감할 수 있는 주제이므로 중간에 불편하시면 바로 뒤로가기 부탁드립니다.
요즘 뭔가 나라도 그렇고 친구가 중국 무비자 입국에 대해 릴스를 보내기도 하고,
의대생 살인사건 판결부터 이것저것 뉴스들이 속전속결로 떠오르는 것 같다.
나는 주로 모든 정보에 대해 걸고 넘어지는 편이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뉴스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와전이나 과장될 여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일반적인 피상적인 말에서도 진심을 묻는다.
네 의견은 어디서 온건지.
msg가 과하게 들어간건지,
아니면 사실 그대로의 기반을 들고왔는지.
마치 의심병 환자마냥 계속 캐묻고 다닌다.
결국 뉴스와 속보다 한 사람의 주관이 덧입혀진 필터가 껴있다고 생각하고 거리를 두고 보면 이게 정말 맞는건지 끊임없이 분석하게 된다.
소문도 결국 그런게 아닌가?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두가 한번씩은 겪어보지 않았나?
너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교묘한 심리를 너무나도 잘 활용하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이 든다.
아주 위험하면서도 달콤한 늪이지 않은가.
근데 그 위험보다는 달콤함만 축내는 우리 모습이 비쳐보일때도 있지 않은가.
누가 위험을 보려고 하는가.
차라리 정보화 시대가 아니고 과잉 정보 속에서 자극적인 것을 보지 않았던 세대였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당장 앞에 놓인 문제에 급급하며 행복을 찾아나가지 않았을까?
지금의 사회는 우리가 만들고 발전시킨 기술에 스스로를 더 옭아매고 있는 느낌.
겉으로는 발전인데 점점 시야가 더 어두워지는 느낌일까.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의 주관적인 시선에서 머무르지 않고 멀리서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소통이 되려면 서로가 멀리서 보는 시선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미 과장되고 허위 사실이랑 실제 사건이 뒤엉킨 이 모순 가득한 사회 속 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기도 힘든데 타인까지 생각하기 힘들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의 기준 속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는 극단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지만,
계속해서 그 거리가 멀어진다는건 스스로 깨닫기 어렵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걸 더 부추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알면 알수록 무섭다.
한 영상에서는 이조차도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며 무지한 이들 때문에 오히려 변화가 없다며 결국 또 울타리로 가두려고 한다.
무관심하다고?
요즘 정보화 시대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들과 나도 모두 유튜브를 키면 비슷한 알고리즘과 비슷한 자극적인 뉴스로 도배되어있는데,
그걸 쉽게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아예 무관심한 이들도 존재하겠지.
어찌 되었든, 그걸 알면서도 그 깊이의 위험성에 거리를 둔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고가 피상적으로는 확고하고 튼튼해보이더라도.
이조차도 누군가에겐 깨어있는 척이라며 비아냥받겠지.
그 순간마저도 우리가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는지,
나조차도 그 잣대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지 그만큼 많이 중독되고 노출된게 아닐까.
타인의 시선에 과한 의식과 경계.
방어적 기제가 깔릴 수 밖에 없는 환경.
겉과 속은 점점 괴리가 커지지 않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법 안에서 지켜야 한다고 하며,
누군가는 퇴폐한 법에서 지킬 건 없다고 하며.
누군가는 법의 형량이 과하다며 상소하고,
누군가는 법이 너무 약하다며 사형까지 해야한다고 하며.
누군가는 작은 금액으로 일희일비하며,
이로 인해 또다른 욕심을 낳기도 하며,
누군가는 결국 부자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말과 기부를 하며,
누군가는 니들은 가난함을 몰라서 논하는 것이라며 적대심을 드러내기도 하며,
누군가는 공백기에 대해 두려워하며 내가 늦은게 아닐까 하며 스펙 쌓기에 열중하며,
누군가는 그 공백기를 노는데 사용하지 않았냐며 군대까지 들먹이며 좁혀지지 않는 말을 보내며,
다른 누군가는 시위로 적극적으로 표출하기도,
소극적으로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기도 한데.
이 너무나도 다양한 생각들을 강요와 혐오로 변절된게 아닐까.
그럼 또 대책을 강구하겠지.
네 해답은 뭐냐고.
솔직히 명쾌한 해답은 없다.
그게 진작 있었으면 모든게 해결이 되었겠지.
그들이 말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여태 역사가 혼란과 전쟁과 죽음을 야기했더라면,
모두를 만족시키고 행복한 결말이 없다는것은 알지 않은가.
그냥 끝이 죽음이라면 이 순간이 행복하면 안되는걸까?
각자의 최선의 방식대로,
타인과의 행복을 비교하고 의식하고 재단하기보다는 나를 더 들여다보고 무엇을 원하는 지 묻는게 정녕 이기적인걸까?
아니, 오히려 이기적이어야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불완전한 인생 속에서의 최선이지 않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해온걸까?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드러내는 순간들이,
타인들에겐 정작 다른 의도대로 흘러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씨앗이 되는게 아닌가.
그런 인정욕구가 욕심이라고 하기엔 또 너무 과장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건 인정해주는 사람의 수보단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보여주는 인정만 있어도 충분히 깊이있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닌가.
참 사람이란게 얄팍한 것 같기도 하다.
작고 깊이있는 공감을 넓고 깊이없는 공간에서 찾으려 하는게 아닐까.
점점 그 공간에서 우리를 노출시킬수록 혼란스러운 생각은 단순화된 사고로 고착화되지 않는가.
점점 더 단순해지고,
간단명료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정도로 위대한 틀에 끼워맞춰야지만 행복한 인생일까?
그럼에도 나는 그런 스스로에 대한 이기심이 폭력이나 다른 이를 짓밟는 도구로 쓰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참 어려운 일이다.
날카로운 가시로 방어하지 않으면 이용당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이 귀에 맴돈다.
이런 이들조차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는게 맞을까?
당장 운이 안좋게 심장마비가 올 수도,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연약한 삶에서 우리가 꼭 진리를 얻어야만 할까?
그냥 스스로의 기준 속에서 타인과 나를 끝없이 재단하며 맞춰나간다는게 옳은 삶일까?
각자의 방식을 존중할 수는 없을까?
솔직히 무섭다.
나도 단정지을 수 없고,
애초에 우리 인간 자체가 형용하기 어렵기에 단순한 틀로 이해하려고 만들어둔 목장에 넣어 분류하려는게 아닐까.
일일이 모두의 다름을 존중하며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기에,
규칙과 시스템 속에서 일반화하면 통제와 관리가 쉬워지기에.
그래도 이전에는 그 속에서도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나선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근데 요즘은 그 울타리가 늪이 되고 심연이 되어 앞을 못 본 비율이 높아진게 아닐까,
조심스레 말을 꺼내본다.
아무리 자유가 존중받고 다양하게 살 수 있다고는 하는데, 왜 더더욱 우리는 단순화된 분류를 추구하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하면 피곤하게 사는걸까?
본래 그렇게 사고할 수 있는 영역 자체로 살기엔 피곤하다는 걸까?
혹은,
이 각박한 현실 속 그렇게 사고해봤자 나만 힘들다며 애써 외면하는걸까.
각박한 현실을 논하면 또다시 말이 달라지지 않나.
더 자유로워졌다며,
그런데 왜 그들이 속한 직장과 학업에 얽매여 힘듦을 호소하는가.
그럼 이 삶이 발전된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먹고 살기 풍족해졌다고 해서 행복이 따라오는게 맞을까?
기본적인 의식주는 필요하지만 욕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약한 마음을 이리저리 이용하고 뒤흔드는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일까.
그래서 그 피곤한 뉴스 속에서 살기보다는,
뒤죽박죽한 내 머릿 속에서 살기로 했다.
그들에게 피해가 될 바엔 스스로 안고 가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뭔가 꽉 매어있는것 같다.
답답한 유교 문화의 잔재가 남아서일까.
기득권 세대와의 소통의 부재여서일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마음의 신호를 그렇게 붙잡는 이유가 뭘까?
너무 급진적으로 발전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일까.
또다시 판단할 수 없는 논제에 갇혔다.
다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에게는 그들이 엇나간게 아니라는 수신호가 되었으면 한다.
이 피곤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세지가 될 수 있도록.
생각보다 다양한 곳과 예측불가능한 곳들에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다만 굳이 드러내질 않는것이라는걸,
드러내봤자 과시나 품평에 논하는 초연결 사회 속 스스로의 행복을 좇는 이들이 얼마나 더 대단한지 새삼 또 느낀다.
세상을 혐오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이해가 된다.
나 역시도 그래왔었고,
어쩌면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만큼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과 진심을 숨길 수 밖에 없는 사회이기에.
더더욱 조심스럽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주변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
내가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점점 하나하나 살펴보면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감정의 원인을 분석하고 최선의 방식을 고민해보고 진심으로 나를 대할 때,
차가운 연결이 아닌 점점 따뜻한 연결이 되지 않을까.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란 걸 잘 안다.
너무나도 고독하고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 순간마저도 타인을 의식하던 기억에 매몰되어 이게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다.
근데,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니, 확신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꿈같은 이상이 실현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꾸 꿈을 꾸는 내가 오늘도 밉기도 하다.
무슨 심정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심오한 얘기는 전체공개로 하지 않는데,
이번 글은 스스로에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나도 믿지 않았던,
믿고 싶지도 않았던,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자책만 하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 소수의 좋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있어서 스스로가 복받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해서일까.
당신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저 진심어린 경청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단지 그 벽이 타인에 의해 허물어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를 돌봐야 무너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더 괴롭다.
하지만 그 조건에는 결국 한 사람이라도 진심을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내가 그 역할을 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잡았다.
그 사람이 되어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정치도, 종교도, 가족도 모두 다 부족했던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이 결론조차 확신보다는 최선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
나도 정답은 없다,
다만 이게 나의 행복이고 이상이고 삶의 의의라는 내면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들에게서 받은 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서 희망이 전달되는게 아닐까.
편안함에 안주해서는 나태해지고 의지가 꺾일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도 되뇌인다.
변할 수 있다고.
안좋은 쪽이든, 좋은 쪽이든.
오히려 그게 당연한거라고.
미래의 내가 변절된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나의 이 순간은 어떻게든 지금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 속에서 내린 가장 명료한 해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기록하게 되었다.
결론은 나도 언제든지 부정적인 생각과 언행에 사로잡혀 바뀔 수 있다는 점,
타인에 의해 최선의 행복을 찾은 이들조차도 다시 지옥같은 나날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점.
다만 이런 가능성조차 배제하고 행복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허울뿐이지 않은가.
꿈에서는 가능하겠지.
오히려 이런 직설적인 말이 필요한게 아닌가?
환상에 갇혀 살면 이상과의 괴리는 더더욱 커진다.
대신, 똑같이 비슷한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스스로에 대해 내려본 행복의 기준을 한번이라도 세우고 안세우고의 차이는 살아갈 의미를 찾는데 큰 차이가 생긴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런 우울과 혼란함 속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계속 붙잡으며 악몽을 꾸며 밤을 지새우는 나도,
스스로에 대한 행복의 기준을 세워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다른 누군가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낙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두에게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후의 선택은 각자에게 맡기기로.
결국 나의 2025년 10월, 가을의 포문은,
이런 생각으로 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