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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 (有名無實)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음.

by 싱숭생숭


왜 한국에서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 머물러야 하는가.

왜 그들의 노고는 ‘보험 적용조차 되지 않는 사치’로 취급되고,

그들의 헌신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가.

의사라는 직업은 국가가 보장한다.

의대에만 들어가면,

이미 사회적 승인은 따놓은 당상이다.

국가는 면허라는 확실한 울타리를 세워주고, 의료보험 체계 속에서 그들의 전문성을 공적으로 보장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를 목표로 삼는 이유는 단순하다.

의사가 되면 안정된 소득과 지위가 거의 보장된다는 사실,

그것이 수험생들과 부모 세대가 의대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물론 모든 의대생이 소명의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소명보다 안정이 먼저 고려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반면, 심리상담사는 어떤가.

그 길을 가는 순간, 안정된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자격이 아닌 민간자격에 의존해야 하고,

보험 체계 밖에서, 언제든 외면당할 수 있는 불안정한 노동으로 버텨야 한다.

상담 한 회기당 5만 원에서 15만 원이라는 비용은 고스란히 내담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이 구조 속에서 상담심리사는 늘 경제적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생각해보라.

20대 초반, 아직 아무 기반도 없는 청년이 상담심리사의 길을 택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의사가 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의대에 들어간 학생은 최소한 ‘합격’이라는 순간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전문의 과정을 마치면 높은 연봉과 안정된 커리어가 기다리고,

사회적으로도 존경과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상담심리사의 길은,

대학원에 진학해도, 수련을 받아도,

그 끝이 불투명하다.

“내가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늘 목을 조른다.

그래서 한국에서 상담심리사의 연령 분포를 보면,

대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30~40대 이후가 많다.

청년들에게 이 길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너무 위험한 선택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이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명감이다.

의사보다 더 위험한 불확실성을 떠안으면서도,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짊어지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의 헌신을 외면한다.

보험도 없고, 제도적 보장도 없다.

그들의 자리는 기득권 직역의 벽에 가로막히고,

그들의 전문성은 의사단체의 반발에 묻힌다.

결국 상담심리사는 의사 사회의 카르텔이 만든 구조적 피해자로 남는다.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왜 한국 사회는, 오직 의사만을 최상위에 올려놓고,

다른 직역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가?

왜 다른 나라에서는 의사와 심리사, 사회복지사, 간호사가 역할을 분담하며 협업하는 구조가 가능했는데,

한국만은 여전히 ‘의사 중심’의 단일 체계를 고수하는가?

어쩌면 답은 이미 드러나 있다.

한국에서 의대는 단순히 하나의 진로가 아니다.

그것은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주어진 안전한 인생 보증 수표이며,

부모 세대에게는 자녀를 통해 가문의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투자 상품이다.

의대에 몰리는 이유는 숭고한 소명이 아니라,

돈과 안정, 지위라는 세속적 보상 때문이다.

반대로 상담심리사는 소명만 있고 보상이 없기에,

제도적으로도 끊임없이 밀려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물어야 한다.

사람을 살린다는 본질적 의미는 의사만의 전유물인가?

왜 상담심리사의 헌신은 보상받지 못하고,

의사들의 경제적 기득권만이 국가적 울타리 안에서 두텁게 보호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의대생들은 정작 가장 절실히 사람이 필요한 현장을 외면한다.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중증외상센터 같은 분야는 늘 인력이 부족하다.

환자의 생명이 시시각각 오가는 자리,

진짜 ‘소명’이 필요한 자리는 오히려 버려진다.

그곳은 보상은 적고,

리스크는 크며, 노동 강도는 지옥과도 같기 때문이다.

반면, 상담심리사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제도적 보장도, 보험 적용도, 사회적 권위도 없다.

“이 길을 가면 안정된 미래를 살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목을 조르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길을 택한다.

계산 때문이 아니다. 사명감 때문이다.

타인의 눈물과 절망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이 극단적 대비 속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진짜 소명 위에 서 있는가?”

보험과 제도가 두텁게 보호하는 직업이면서도 안정과 수익을 좇아 안전한 길만 택하는 의사들인가,

아니면 아무런 보호도 없이 불확실성 속에서 오직 사명 하나로 버티는 상담심리사들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한다.

왜 우리는 소명을 따르는 직업을 홀대하고,

안정과 수익을 좇는 직업만을 최고의 자리로 추앙하는가?

왜 다른 나라에서는 다층적 직역이 협력하는 구조가 가능했는데,

한국만은 여전히 의사만을 중심에 세우고,

나머지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넣는가.

한국에서 의대는 단순한 진학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곧 계급 이동의 마지막 보증서이며,

‘한 번 들어가면 절대 굶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의 결정체다.

나는 이 문제의 핵심이 단순하지 않다고 본다.

부모 세대의 투자와 계급 재생산,

국가 의료보험 구조,

사회적 인식,

수험생들의 심리적 압박,

직역 다원화 실패.

이 다섯 가지가 서로 맞물리며,

한국 사회의 의대 쏠림이라는 괴물을 길러냈다.

그리고 이건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3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한 심리상담 선생님은,

이 구조를 마치 끝내 허물어지지 않을 벽처럼 묘사하곤 했다.

직접적으로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것”이라 말하진 않았지만,

그분의 눈빛과 목소리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체념이 스며 있었다.

나는 그 체념이 단순한 개인의 비관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만들어온 거대한 구조의 무게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1. 부모 세대의 투영과 투자

의대 쏠림을 단순히 학생 개인의 욕망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뒤에는 부모 세대의 절박한 바람이 겹쳐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소한 자신보다 나은 삶을 안겨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은 삶”의 기준은 좁게 정의되어 왔다.

안정적 직장, 높은 연봉,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지위.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길이 의사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대 입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프로젝트가 된다.

사교육비 수억 원이 투입되고,

집안의 모든 자원이 한 아이의 의대 합격으로 집중된다.

의대는 단순한 학과가 아니라,

가문이 생존하기 위한 마지막 투자처로 기능한다.

2. 국가의 역할 – 의료보험 구조가 만든 불평등

한국의 건강보험 체계는 세계적으로 비교할 때,

“국민 전체가 적은 비용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료 서비스 제공자에게는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국가의 수가 정책이 의사들을 ‘돈 되는 과’로 몰리게 만들고,

의대생들은 애초부터 “소명 vs 안정”이 아니라

“소명 vs 생존”이라는 기묘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 구조가 누적되면서 의대는 곧 경제적 안정의 상징이 되었고,

소명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3. 사회적 인식 – 의사만이 성공이라는 좁은 틀

한국 사회에서는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적 능력, 사회적 책임감, 경제적 성공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다른 직업군은 아무리 전문성을 가져도 이런 종합적 인정을 받기 어렵다.

교수, 변호사, 공무원도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의사는 유일하게 “인정받는 성공”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 인식은 단순히 대중적 편견이 아니라,

실제 구조적 현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하다.

즉, 한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은 단순히 직업 선택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사회적 인증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4. 심리적 효과 – ‘의대 아니면 실패’라는 압박

이 모든 구조가 합쳐지면,

최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의대가 사실상 강제된 선택이 된다.

“성적이 되는데 왜 안 가?”라는 질문은 선택권을 빼앗는다.

그 결과,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과 소명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으로서 의대를 택한다.

여기에는 심리적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의대에 진학하는 순간,

그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성공’이 보장되지만,

정작 의사의 본질적 소명(사람을 살리겠다는 의지)은 입학 순간부터 희미해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과 선택, 수익 구조, 생활 패턴이 모든 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5. 상담심리사와의 대비 – 구조적 불균형

이 대목에서 다시 상담심리사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 길을 간다.

보험 체계 밖에서, 민간 자격에 의존하며,

“내가 이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을 매일 마주한다.

즉, 한국 사회에서 의대는 “보장된 성공”의 길이고,

상담심리사는 “보장되지 않은 소명”의 길이다.

이 구조적 불균형이 바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리이자,

왜 우리는 여전히 상담심리사를 제도적으로 외면하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다섯 가지 층위가 얽히면서,

한국 사회는 의대를 최상위권 학생들의 ‘안전한 선택지’로, 상담심리사를 ‘불안정한 희생자’로 만들어왔다.

이 구조는 한 개인의 욕망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굳건히 짜놓은 계급 재생산 장치이며,

거대한 기득권의 카르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다른 나라에서는 다양한 직역이 정신건강을 분담할 수 있었는데, 한국은 끝내 의사만을 중심에 세우려 하는가?”

“왜 소명이 필요한 현장은 기피되고, 안정과 수익만이 진로를 결정하는가?”

“왜 상담심리사처럼 사명감 하나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직업군은, 끝내 사회적 보상과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소명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명은 여전히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이 구조 속에서는, 결국 안정과 수익만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켜 버리는가?

나는 해외 사례를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에게 브라질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브라질 의대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의대가 한국처럼 최상위권 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물론 의사라는 직업이 존중받기는 했지만,

소득이 한국처럼 압도적으로 높지도 않았고,

따라서 의대를 택하는 이유는 대체로 안정된 성공이 아니라 사명감이었다.

실제로 브라질 의대생들의 학문적 수준은 한국의 최상위권 학생들에 비해 높지 않은 경우도 많다.

수학 능력만 보더라도,

한국 대학생들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의학이 본질적으로 거창한 학문적 천재성을 요구하는 직업이 아님을 보여준다.

의학은 방대한 공부량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힘은 뛰어난 두뇌가 아닌,

끈기와 성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이다.

따라서 브라질에서 의대를 택하는 것은

“머리가 좋으니까”가 아니라,

“이 길을 마음 다해 걸어가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이 점에서 한국과 브라질의 차이는 극명하다.

한국에서 의대는 곧 “사회적 성공의 마지막 보증 수표”다.

그 방대한 공부는 사명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안정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되어버린다.

나는 여기서 큰 아이러니를 느낀다.

사명감으로 공부해도 벅찬 길인데,

그 사명이 빠진 자리에서 오직 안정만 좇으며 버티는 공부라면,

그 무게는 오히려 더 공허하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그 공허함 속에서 많은 의대생들이

결국 피부과, 성형외과 같은 길을 택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솔직히 말해,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공허한 고통 속에서 내과, 흉부외과, 응급센터 같은 곳에서

끝없이 무너지는 환자를 붙잡는 대신,

조금 덜 힘들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선택은 개인의 비겁함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선택할 수 없게 만든 한국 사회의 구조적 강제가 아닐까.

일본 – 공인심리사 제도의 도입

반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상담심리사 제도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해왔다.

2017년, 일본은 ‘공인심리사’ 제도를 도입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국가시험을 거쳐 공인 자격을 얻으면,

의료, 교육, 복지 현장에서 심리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다.

이 제도의 도입은 일본 사회가 정신건강 문제를

단순히 ‘정신과 의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다양한 전문가들이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물론 아직 초기 단계라 한계도 있지만,

심리사라는 직역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변화다.

한국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한국에서는 상담심리사가 여전히 민간 자격에 머무르며,

보험 체계 밖에서 불안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본은 최소한 제도의 문을 열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 문을 굳게 닫아둔 채,

의사라는 직역에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

미국과 유럽 – 다층적 직역과 보험 적용

미국과 유럽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층적 정신건강 체계를 구축해왔다.

미국: Clinical Psychologist, Licensed Counselor, Social Worker가 모두 주 면허 제도를 통해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내담자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전문가를 선택할 수 있고, 상당수가 보험 적용을 받는다.

유럽: 독일, 영국 등은 Psychotherapist라는 제도를 두어, 심리치료사가 의료보험 안에서 활동한다.

의사만이 아니라, 심리학을 전공하고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공적 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구조의 장점은 명확하다.

의사는 생물학적 치료에 집중하고,

심리사는 심리적·정서적 치유에 전념하며,

사회복지사는 생활 환경을 보완한다.

즉, 여러 전문직이 협력해 한 개인의 건강을 입체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한국 – 여전히 닫힌 문

이와 비교할 때 한국은 여전히 단일 직역 구조에 머물러 있다.

정신건강 문제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만이 제도권에서 인정받고,

심리사는 주변부에 머무른다.

보험 적용도, 국가자격도 없다.

결국 한국 사회는 다양한 전문성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채,

의사라는 직역만을 과잉보호하며,

정신건강의 돌봄을 협력의 장이 아닌 배제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협력과 분담을 택했지만,

우라나라는 끝내 배제와 독점을 택해왔다.

그 결과,

상담심리사와 같은 직역은 그림자 속에 방치되고,

정신건강 문제는 언제나 땜질식으로만 다뤄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구조를 방치할 것인가?

기득권이고 뭐고,

제발 이제는 정신 좀 차려야 하지 않나?

출산율은 붕괴하고, 갈라치기는 심해지며,

정신질환 환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고통은 사회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데,

왜 자꾸만 모른 척하며 눈을 돌리는가?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제도 밖에서 허덕이는 동안,

기득권의 울타리 안에만 안전을 가두는 사회.

그 사회가 과연 앞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의사라는 직업만을 최고로 치켜세워왔다.

그 선택은 안정과 지위라는 보상을 보장했지만,

동시에 소명을 점점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담심리사와 같은 직업군은

제도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사명감만으로 버티는 희생자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길을 달리 걷고 있다.

브라질은 사명감을 중심에 두었고,

일본은 공인심리사 제도를 도입했으며,

미국과 유럽은 다층적 협력 구조를 구축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닫힌 문 앞에서,

의사라는 단일 직역에만 모든 권한을 몰아주고 있다.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구조를 방치할 것인가?

출산율은 무너지고,

정신질환 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고통은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데,

왜 우리는 모른 척하며 눈을 감는가?

기득권을 지키는 일보다 더 시급한 것은,

사명감을 지키는 일이다.

의사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만 사회를 가두는 순간,

그 외부에서 버티고 있는 수많은 소명들은

끝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안정과 지위만을 좇는다면,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건강한 사회’에 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제도의 문을 열어,

소명을 지키는 이들의 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https://m.youtube.com/watch?v=_wS4L6wotJw&pp=0gcJCRsBo7VqN5tD

https://youtu.be/gaJ38GMjA6I?si=hIeQbx3U0UF9oYJ_

https://m.youtube.com/watch?si=0pU1WbcmRDaA_d-5&v=yE9-ENNbXs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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