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운명에 달려 있음.
어느 밤, 내 방의 촛불이 스스로 꺼졌다.
누구도 후— 불지 않았고,
유리컵 벽에 그을음만 남았다.
나는 그 장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저렇게, 모른 채, 자연스럽게 꺼지고 싶다.”
의료의 빛으로 남은 수명 한 칸 한 칸을 억지로 밝히기보다,
어둠이 제때 찾아오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검진 통보서 한 장이 내 달력의 모든 칸을 좀먹는 독이라면, 나는 그 독을 내 삶에 들이지 않겠다는 쪽에 가깝다.
친구는 말했다.
“건강검진은 예방이야. 모르니까 더 위험해.”
나는 대답했다.
“알아버려서 그때부터 매일 무너지는 삶도 있다.”
그러자 친구가 웃었다.
“넌 중세에 사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중세가 아니라,
이 순간의 내가 이렇게 느끼고 선택할 뿐이라고.
내일의 나는 또 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직관을 기록해둔다.
죽음을 늦추기 위한 ‘인위’가 내 존엄을 파먹는다면,
나는 오히려 모르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이 감정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검진의 이득과 해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현대 의학의 인식과도 일부 맞닿아 있다.
내 몸 어딘가엔 오래전부터 작은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공포가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다.
검진 예약 알림은 그 구멍을 벌려서 침전물을 들이붓는다.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몸이 먼저 무너지고,
마음은 가면을 뒤집어쓴 채 “괜찮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밤이 오면,
나는 또 달력을 펼쳐 두려움의 잔여물을 세어본다.
“미리 알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은, ‘알아버린 이후’의 시간비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그 비용은 감당 가능하지만,
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내게 삶은 ‘추가 생존 개월 수’가 아닌,
‘무너지지 않는 하루’에 가까워서다.
우리가 말하는 ‘예방’은 두 갈래다.
1차 예방: 애초에 병이 생기지 않게 생활·환경을 조정하는 것(예: 금연, 백신, 작업환경 개선).
2차 예방: 이미 생긴 (혹은 생기고 있는) 병을 조기에 찾아내는 ‘검진’ 중심의 전략. [웹] 
친구의 “검진=예방”은 주로 2차 예방을 말한다.
반대로 나는 1차 예방만의 언어로 살아가겠다고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어느 쪽이 더 ‘옳다’기보다,
각자의 가치와 감당 비용의 문제다.
WHO도 말한다.
“언제 검진하지 않는 것이 옳은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검진은 무거운 활동이며, 잘못 설계되면 이득보다 해가 클 수 있다.”
나는 오늘은 1차 예방만의 언어로 살아가겠다고 쓴다.
이건 현재의 해석이고,
내일의 나는 다시 검진을 고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현대 의학은 검진의 이득을 입증한 영역과 근거가 불충분하거나 해가 우려되는 영역을 구분해 왔다.
예를 들어, 고위험군에서의 저선량 CT 폐암 검진은 사망률 감소 근거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용·방사선·거짓양성·추가검사 등의 대가가 붙는다. [웹] 
피부암 검진처럼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된 영역도 있다(무증상 성인 일반인 대상).
전립선 PSA는 대표적 ‘선택형’ 검진으로,
작지만 실재하는 이득과,
과잉진단 및 부작용 위험 사이에서 개인 가치로 결정하라고 공식 권고가 말한다. [웹] 
또한 과잉진단(검진이 아니었으면 평생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병까지 찾아 치료하게 되는 현상),
리드타임 편향(일찍 진단되어 ‘더 오래 산 것처럼’ 보이는 착시),
길이 편향(느리게 자라는 병이 검진에 더 잘 잡혀 치료성공률이 과대평가되는 현상) 등은,
내가 느끼는 “알아버린 뒤의 삶의 파괴”를 데이터 언어로 번역해준다. [웹] 
그리고 거짓양성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적 후유증은 종종 길게 간다.
한 연구에선 6개월 뒤에도 실존적 가치관과 내면의 평정이 변할 만큼의 파장이 보고된다.
이는 ‘나만 유난이 아니었구나’를 말해준다. [웹] 
따라서,
“검진이 내 삶을 갉아먹을 수 있다”라는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다.
다만 영역별로 이득과 해의 스펙트럼이 아주 다르다.
이 지도를 펼쳐놓고,
각자 ‘나의 값’을 찍는 것이 현대적 선택이다.
한국의 국가 암검진 프로그램은 위·간·대장·유방·자궁경부·폐 등 6대 암을 대상으로 하고,
소득 및 보험 유형에 따라 본인부담이 다르다.
제도는 분명히 인구집단 수준의 건강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 왔다.
다만 개인의 선택은 제도의 평균 최적화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웹] 
나의 선택은 이렇다.
2차 예방은 영역별 이득-해 양면을 읽고,
내 심리적 비용이 감당되는 범위에서만 선별한다.
나는 “검진 일정이 내 삶의 리듬을 파괴한다면 하지 않는다”는 가치 선언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오래 사는 것만큼 어떻게 떠날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현대의학은 노화와 죽음의 관리를 정교화했고,
그 덕에 많은 이들이 혜택을 봤다.
동시에,
떠남의 주권은 종종 ‘연장’과 ‘치료’라는 거대한 기계의 진동에 묻힌다.
나는 기계를 적으로 삼지 않는다.
다만, 기계의 스위치를 누를 권리와 끄는 권리를 동일하게 인정한다.
검진은 종종 스위치를 미리 켜는 행위다.
어떤 이는 그 빛으로 구원을 얻고,
나는 그 빛 아래에서 나의 밤을 잃는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떠날지를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그 형식을 이렇게 적어두지만,
훗날의 나는 또 다른 형식을 원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기록은 순간의 봉인이 된다.
중세적이라는 말은 근거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내가 거부하는 것은 근거의 부재가 아니라,
근거의 편향된 사용이다.
수많은 권고들은 이미 “모든 검진이 선이 아니다”,
“개인 가치에 따라 결정하라”라고 말한다.
WHO는 “언제 검진하지 않는 게 옳은지 아는 것”을 강조한다.
미국의 권고도 전립선 및 피부암 등에서 ‘공유의사결정’을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이게 어찌 중세인가.
오히려 나는 현대적 회의의 편에 서 있다. [웹]
알 권리는 많이 말하는데,
모를 권리는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검진은 알 권리를 실천하지만,
그 순간부터 ‘알아버림’의 정서비용이 따라붙는다.
어떤 연구는 “추적검사·감시(surveillance)가 재발 공포를 키울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어떤 사람은 괜찮고,
나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내게 중요한 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지,
‘남은 시간을 얼마로 추정할 것인가’가 아니다.
폐암 고위험군 저선량 CT 같은 영역에서,
조기 발견이 생사를 갈랐다는 사례는 실제로 존재한다.
어떤 이는 그 선택 덕분에 손주를 더 오래 본다.
나는 그 이야기의 현실과 존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야기의 존엄이 나의 존엄의 방정식을 자동으로 대체할 순 없다.
검진은 선택의 기술이다.
각자의 생은 각자의 물성으로 계산해야 한다.
의학경제학은 QALY(삶의 질 보정 기대수명) 같은 척도로 효과를 잰다.
하지만 나의 삶의 질 함수는 다르다.
내 함수는,
“두려움에 점령당하지 않은 아침 1개”
“검진 결과 대기일이 없는 일주일 1개”
“알림 메시지가 오지 않는 한 달 1개”
의 가치가 매우 크다.
나는 이 값을 내가 정한다.
국가와 학회가 인구집단 최적화를 하듯,
나 또한 개인 최적화를 한다. 이게 나의 자유다.
어쩌면 나도 이런 QALY를 말하는 겁쟁이일지도 모른다.
“남은 수명을 어떻게 쓸까”라는 계산을 거부한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 계산을 끝내 직면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 것이기도 하다.
직면하고 난 이후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그 문을 열지 않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이를 회피라 부를 테지만,
나는 그 회피조차 내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나는 모른 채 떠나겠다고 말하지만,
내 말은 타인의 검진 선택을 비난하는 기표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 검진은 존중받아야 할 용기다.
내게는 그 용기가 다른 모양일 뿐,
나는 모르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를 택한다.
그 선택이 불러오는 책임 또한 내가 진다.
이것이 내가 믿는 성인의 윤리다.
국가 프로그램은 평균의 생명을 위해 설계되고,
그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평균의 최적은 종종 특정 개인의 최적과 어긋난다.
나는 평균이 아니며, 나의 구멍, 가면 그리고 침전물의 점성은 평균과 다르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월주의적인 시선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기계에 “대체로 이득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견딜 수 있는가?”
나는 ‘추하게 늙는 것’이 싫다고 했다.
이 문장은 오해를 부른다.
늙음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다.
질병·치료·관리를 무한히 덧대며 주체성을 소모하는 상태.
바로 그걸 나는 두려워한다.
검진은 때로 그 궤적의 시동 버튼이 된다.
어떤 이에겐 계시의 버튼,
내게는 삭제 버튼이다.
나는 삭제를 택할 권리를 말하고 있다.
실존주의는 선택으로 자기 자신을 만든다고 말한다.
나는 모를 권리의 선택으로 나를 만든다.
철학자 스토아는 통제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라고 했다.
검진 통보서가 열어젖히는 공포는,
내게 종종 통제 불가능의 문을 연다.
그래서 나는 그 문을 애초에 열지 않는다.
현대의학의 회의주의는 “검진은 때로 해를 낳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을 나의 자기결정의 토대로 삼는다.
스토아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라”라고 했다.
지금의 나는,
검진 결과라는 문을 애초에 열지 않는 선택을 기록한다.
훗날 나는 또 다른 문을 열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그럼 그러다 늦으면?
아파서 갔더니 말기암 진단을 받는다면?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다.
미리 알아 연명하는 시간 대신,
모른 채 제대로 산 시간을 택했을 뿐.
그래서 뭐가 남나?
달력의 흰칸이 남는다.
검진 일정과 재검 알림,
추적 CT, 수치 변동을 적어넣지 않은 빈칸.
그 빈칸을 나는 살았다고 부른다.
나는 검진을 포기한다고 해서 모든 의학을 포기하진 않는다.
급성 증상 및 응급은 즉시 의료를 신뢰한다.
예방접종은 1차 예방의 핵심으로 수용한다.
삶의 리듬을 깨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기본 검사는 자가 가치판단으로 선별할 수 있다.
이 역시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나는 모른 채 떠나는 평온을 원한다.
그건 겁이 아니라 형식이다.
나의 죽음을 나의 형식으로 설계하는 일.
검진은 어떤 이에겐 생을 늘리는 기술이고,
내게는 오늘을 축내는 기술이다.
그래서 나는 모를 권리를 택한다.
누군가는 신식 문명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든다.
현대의 데이터가 허락한 회의, 성인의 자기결정.
그 위에 나는 선다.
오늘의 촛불이 스스로 꺼질 때까지,
나는 오늘을 산다.
나는 실제로 몇 사람을 본 적 있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국가검진에서 위암을 조기에 발견했고,
큰 수술 없이 살아남았다.
가족 모두가 말했다.
“검진 덕분에 살았다.”
이 말 앞에서 나는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검진은 분명히 생명을 구하는 빛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례도 있다.
한 지인은 유방촬영에서 거짓양성이 나왔다.
“혹시 암일 수도 있다”라는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6개월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밤마다 시계 초침만 바라보다가,
나중에야 정상이란 결과를 받았다.
몸은 멀쩡했는데,
마음은 이미 병든 것 같았다.
그 후로 그 사람은 오히려 병원 근처를 지나가면 숨이 막힌다고 했다.
나는 이 두 얼굴을 본다. 빛과 그림자.
내 선택은 바로,
이 두 얼굴 중 어떤 얼굴이 내게 더 치명적인가에 대한 계산이다.
나에게는 후자의 그림자가 훨씬 더 무겁다.
나는 몸이 아니라 마음의 붕괴를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방정식에서 검진은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크다.
의학 논문은 숫자로 말한다.
“검진을 통해 암 사망률이 몇 퍼센트 감소했다.”
“과잉진단율이 몇 퍼센트다.”
그 숫자는 냉정하다.
그러나 그 냉정함이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과소평가한다.
예컨대, 거짓양성의 확률이 5%라고 치자.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 문제 없으니 큰 부담은 아니다.”
그러나 그 5%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될 경우,
내 삶은 6개월이 아니라 수년간 두려움에 갇힐 수 있다.
통계적으로는 작은 수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절대적인 무게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나는 통계의 평균이 아니라, 한 개인이다.”
국가 제도가 평균을 최적화한다면,
나는 내 삶을 개인 최적화로 맞춘다.
그게 나의 철학이다.
검진은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의례다.
직장에서 단체검진을 권유받고,
가족 모임에서 “검진 안 받니?”라는 질문을 듣는다.
검진은 “성실한 시민”의 증표처럼 작동한다.
나는 그 압박이 불편하다.
그것은 내 몸과 내 죽음을 사회가 관리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중세의 고해성사처럼,
병원 앞에 줄지어 앉아,
“나는 성실하게 몸을 점검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게 몸은 교회의 재산이 아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고, 내 시간은 나의 주권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의례를 거부한다.
그것이 나를 이상하게 보이게 만든다면,
나는 그 이상함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건강검진은 종종 생명을 늘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앞당기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암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그 사람은 실제로 죽는 날보다 훨씬 일찍부터 죽음과 함께 산다.
결과지를 받은 날, 그 사람의 삶의 질은 이미 무너진다.
남은 10년이 아니라,
그때부터의 모든 날이 죽음의 그림자로 채워진다.
나는 그 삶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꺼지는 쪽이 내겐 더 행복하다.
내 삶은 양(量)이 아니라 결(質)이다.
검진을 앞두고 나는 이미 경험했다.
전날 밤, 잘 수 없었다.
새벽에 눈을 떴고,
배 속에서 공포가 울컥 올라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직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미 병자가 되어 있었다.
이 또한 공감을 바라지 않는다.
그만큼 너무나도 주관적인 느낌과 감각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내 몸은 의사의 말보다 빠르게 무너졌다.
이 경험은 내게 각인됐다.
“나는 결과를 알기 전부터 병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그 길을 걷지 않으려 한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검진과 치료가 이어주는 삶은 종종 연명에 가깝다.
나는 그 연명 속에서 존엄이 희미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주사기와 수치,
검사표와 약봉지가 삶을 대신하는 순간.
그 순간의 늙음은 삶의 형식이 아니라,
병원의 형식에 종속된다.
나는 그 길을 원치 않는다.
늙음은 주름진 얼굴과 느린 걸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나 병원 의자 위에서만 이어지는 늙음은,
내겐 추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말한다.
“나는 추하게 늙고 싶지 않다.”
그 말은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형식에 관한 선언이다.
나는 그저 이렇게 살고 싶을 뿐이다.
나는 결국,
오늘을 살기로 했다.
내 삶의 달력에는 검진 일정이 없다.
대신 친구와의 대화,
글을 쓰는 시간, 산책의 리듬이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래도 늦게 알면 어쩌려고.”
나는 대답한다.
“늦게 알면,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다.
지금의 나는 지금을 산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 순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중에는 또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 글을 남긴다.
이 순간의 나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실 나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그런 이미지를 쭉 유지하기란 너무나도 힘들다는 걸 잘 알아서일까.
그래서 삶을 운(運)으로 정의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나는 다만 그 안에서 의미를 좇아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연스레 죽겠다.
친구랑 새벽에 전화하면서 나눈 대화인데,
어떻게든 마취해서라도 나를 건강검진에 데리고 간다는 그의 굳은 의지와 그렇지 않은 고집 센 나의 대결.
고집 엄청 센 나랑 대화해주느라 항상 수고한다 ㅎㅎ
고집이 있다는건 내가 지금 숨쉬고 살아있고 스스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오늘도 좋은 꿈 꾸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여러분들도 이 운명같은 나날들이 행복하게 흘러갔으면 합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하든, 저만의 길을 가려고 해요.
불완전한 나를 수용하면서도,
모든 감정들을 다 안고 가려구요.
우울이라는 감정조차 말이죠.
여러분들은 그래도 이런 우울이라는 호르몬 변화에 대해, 요즘은 약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 굳이 저처럼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해요.
어차피 유한한 삶인데,
행복하게만 살 수 있으면 좋잖아요?
여러분들에게 감정을 직면하라는 말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혀 강조하지 않아요.
행복의 기준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니깐요.
하지만, 저와 같이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혼란을 겪고 있는 순간 속,
감정을 직면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게 있거든요.
그런 이들에게는 꼭 감정을 직면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며 따뜻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엄격하게 깎아내리는건 마음 아프잖아요.
누군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들지 않을 때,
이상하게도 저는 그곳에서 비롯된 연민이 바로 제 사명감이라는 느낌이 꽂혔어요.
이렇게 살아야지만,
죽는 순간 주마등을 스쳐보내며 후회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게 저에게 있어서 바로 간절히 바라던 삶의 의미이자,
꺼져가는 촛불이니깐요.
늦은 새벽, 또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네요.
이 순간에도 혹여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혹독한 분들이 계시다면,
잠든 동안만큼은 부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조금 더 희망차고 평안한 하루가 시작되기를.
비록 저조차도 쉽지 않지만,
이 모순적인 삶과 모순적인 나날들,
모순덩어리 같은 인생 속에서
모순적인 위로 한마디를 건네봅니다.
사실 이런 모순덩어리 세상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더라면,
사람은 진작에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너무 걱정은 안 하셨으면 해요.
지금은 칭송받는 심리학자나 예술가, 철학자들도
살아 있을 땐 별나다며 조롱받다가,
죽고 나서야 그 가치가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저도 그 틀에 억지로라도 제 모습을 끼워 넣어야지
뭐라도 된 것처럼 작동이라도 하고,
그래야 덜 흔들릴 것 같아요.
그렇게라도 살아야 인생이 좀 더 스펙타클하지 않을까요. ㅎㅎ
여러모로, 참 많은 생각이 오고 간 하루였습니다.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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