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픔.
나는 어릴 적부터 쉽게 이용당하는 아이였다.
학원에서 숙제를 성실히 해가면 누군가는 내 답안을 요구했다.
“조금만 보여줘.” 그 말은 겉보기엔 별것 아닌 부탁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거절하면 속 좁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웠고,
차라리 웃으며 내어주는 게 더 안전하다고 여겼다.
그 순간마다 나는 내 존재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서만 있는 것처럼 느꼈다.
부모님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터라,
그런 사소한 요구마저도 나를 ‘쓸모 있는 아이’로 만들어주는 착각이 되었다.
나는 이미 어린 나이에 “사랑받기 위해선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면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패딩에 자물쇠가 걸려 잠겨 버렸다.
철컥― 차갑게 잠금이 걸리는 순간,
내 숨은 막혔고 몸은 얼어붙었다.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고,
친구들은 장난처럼 웃으며 떠나갔다.
옷을 벗지도,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매달린 것만 같았고,
호흡은 얕아졌으며, 온몸은 낯선 구속에 짓눌렸다.
겉으로는 ‘장난’이라고 포장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숨통을 조이는 폭력이었다.
교실 가득 울리던 웃음소리는 나를 향한 조롱처럼 메아리쳤다.
나는 아직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처형대 위에 선 죄수 같았다.
손끝은 떨렸고, 눈앞은 아득히 흐려졌다.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은 아직도 몸 깊숙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 장난”이라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호흡조차 가로막는 고통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목소리를 잃었다.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고,
억지로 웃으며 삼켜야 했다.
결국 부모님께 사실을 고백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혼자서 네이버 지식인에 접속해 ‘잠긴 자물쇠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라는 검색창에 절박한 질문을 적어 넣었다.
사실 그때 묻고 싶었던 건 자물쇠가 아니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면 속에는 단 한 줄의 대답도 없었다.
결국 나는 고모가 사준 소중한 패딩의 끈을 가위로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짧게 “딱” 하고 끊어지는 순간,
패딩의 끈만 잘린 게 아니었다.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끊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 소리를 기억한다.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
금속이 아니라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진동.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그날 이후, 내가 믿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물쇠 사건은 내 삶에서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핍과 상처, 불신과 자책, 그리고 끝내 흔적을 남긴 첫 번째 봉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도움을 청하는 이들도, 선하게 다가오는 이들도,
결국 언젠가는 나를 이용하거나 떠날 거라고 단정했다.
의심은 나를 더욱 고립시켰고, 관계는 하나둘 끊어졌다.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관계를 차단하고, 고등학교 기숙사로 도망치듯 떠났다.
그러나 고립은 구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로움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낯선 교실, 낯선 사람들,
그러나 내 가슴을 죄어오는 건 언제나 그 자물쇠의 기억이었다.
자물쇠는 풀려나도,
내 안의 봉인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끊어진 끈을 붙잡은 채,
언제라도 다시 잠길 수 있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집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내 방 문은 허락 없이 열렸고,
고모에 대한 험담은 벽을 넘어 내 귀에 닿았다.
그 순간마다 벽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도청기처럼 내게 칼날 같은 말들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나는 믿었다.
조용히 지내고, 성적을 잘 받고,
성격을 부드럽게 하면 그들이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직후,
상장 40여 개를 한 파일에 정리해 엄마에게 내밀었다.
조건부 사랑이라도 괜찮았다.
단 하루만이라도 ‘괜찮은 아이’로 보이고 싶었다.
그날만큼은 웃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하루짜리 착각이었다.
다음 날, 집안의 공기는 다시 차가웠고,
나는 또다시 ‘부족한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고모와 연락하기 위해 두 번째 핸드폰을 숨겼다.
그 핸드폰은 고모가 개통해 준 것이었고,
내겐 숨구멍 같은 존재였다.
침대 밑, 서랍 깊숙한 곳,
수학 문제집 사이에 몰래 끼워 두고
불안에 떨며 밤마다 꺼내 들었다.
매 순간 긴장에 떨며,
그 당시에는 그런 행동들이 너무나도 큰 잘못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추적 앱을 핑계로 추궁했다.
나는 부정했지만,
내 목덜미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몸은 이미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고모와의 연락은 또다시 문제로 번졌고,
나는 날마다 들었다.
“고모 집에서 살아라.”
“고모를 엄마로 여기고 나가라.”
그 말들은 칼날이 되어 내 안을 후벼 팠다.
그럴수록 고모에 대한 의존은 깊어졌다.
나는 더더욱 ‘고모가 아니면 숨조차 못 쉬는 아이’가 되어갔다.
첫 가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벽의 어둠,
공중전화 부스 안,
떨리는 손으로 집에서 챙겨 나온 100원짜리 동전을 밀어 넣었다.
“뚜뚜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내 심장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발끝까지 스며들었고,
숨은 흩어지는 하얀 입김으로만 존재했다.
눈가엔 울음이 차올랐고,
수화기 너머로 고모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잠시 뒤 경찰차 불빛이 골목을 비추었고,
부모님과 고모가 함께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살 곳이 필요해, 도움을 청했을 뿐인데,
부모님의 눈에는 이조차도 ‘편을 정한 행동’으로 보였다.
아직 어린 나는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 어른들의 갈등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숨이 막혀 도망친 것뿐이었다.
내게 가출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아이였던 나는 집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지어 너무 무서워서 112에 신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면 상황은 더 악화됐다.
부모님은 내 도망을 점점 무심히 받아들였고,
때로는 “또 나갔냐”는 말로 치부했다.
심지어 내가 “죽고 싶다”라고 진심으로 호소했을 때조차,
그들은 합리화하며 무시했다.
그 순간마다 나는 점점 더 외로워졌다.
울음은 매일 고모가 사준 MP3 속 음악에 묻혀 흘러나왔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세상과 단절된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서조차 외로움이 더 크게 울렸다.
어느 날 울음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위로보다는 조롱 섞인 어조로 우냐면서 말하던 아빠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음악과 글 속에 숨어드는 것이었다.
가사의 단어 한 줄에,
일기장 속 글씨 한 줄에,
나는 내 존재를 겨우 붙잡았다.
초등학생 시절, 새벽녘 수원역까지 홀로 걸어간 적도 있었다.
불 꺼진 상가 건물 사이, 유일하게 켜져 있던 지하철 화장실에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곧 경비원에게 쫓겨났다.
무심코 들어선 뒷골목엔 모텔 간판이 줄지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꼬맹이는 여기 오면 안 돼. 빨리 나가.”
그 말에 나는 겁에 질려 달렸다.
심장은 무너질 듯 뛰었고,
발끝은 땅을 딛는 감각조차 사라졌다.
아직도 그날의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내 귀에 메아리친다.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할아버지에게 관심도 없었냐.”
아빠의 차가운 말은 내 심장을 또다시 쳤다.
고등학교 2학년, 기숙사에서 택시를 타고 온 나는 결국 울며 뛰쳐나왔다.
막막함 끝에, 부모님과 갈등하던 어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부모님은 확신했을 것이다.
“얘는 이미 그쪽 편이구나.”
그러나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어른들의 상속 문제와 다툼은 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판결을 받아야 했다.
누구의 편인지 심문당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어른들은 서로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내게 흘려보냈고,
나는 그 말의 파편을 온몸으로 맞으며 피폐해졌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는,
이미 뿌리 깊은 불신 속에 잠겨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나를 시험하는 듯했고,
나는 늘 틀린 답을 고르는 아이 같았다.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하다가도 속으로는 그 미소 뒤의 칼끝을 의심했다.
사람들의 호의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신기루였고,
나는 그 사라짐에 대비하느라 더 일찍 웃음을 접었다.
그러나 이상한 건,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을 갈망했다는 사실이다.
거부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 모순은 내 삶을 오래도록 흔들었다.
책상 앞에 앉으면 공부가 되지 않았고,
펜을 쥔 손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책을 펼치면 활자 대신 불안이 쏟아졌고,
결국 카페에 가서야 비로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의 시선이 있어야만 집중할 수 있는 아이.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받으려는 내 몸부림이었다.
누군가가 내 필기를 보고 감탄해 주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내 동력이었다.
내 삶이 그랬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고모 손에서 자랐고,
여덟 살 이후에는 동생이 태어나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살았다.
그러나 집은 온기가 아닌 통제와 무관심의 공간이었다.
폭언과 폭력, 잦은 술자리,
고모 탓으로 모든 문제를 돌리던 차가운 말들.
나는 매일 이불속에서 울며 잠드는 아이였다.
고모는 유일한 빛이었다.
친구 같고, 어른 같고, 상담자 같던 사람.
가출 후 가장 먼저 연락했던 곳도 부모가 아닌 고모였다.
그러나 부모의 눈 속에서 그마저 죄의식으로 얼룩졌다.
나는 사랑과 죄책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빛은 분명히 있었지만, 동시에 그림자도 늘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도망치듯 기숙사로 갔다.
새로운 공간은 혹독했지만 동시에 내 자아를 지킬 수 있는 탈출구였다.
공부에 몰두하며, 누군가에게 문제를 알려줄 때 느끼는 뿌듯함은 잠시 나를 살렸다.
그러나 성적 비교와 경쟁은 다시 나를 소진시켰다.
“나는 결국 똑같은 고등학생일 뿐”이라는 체념은 늘 따라다녔다.
나는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철없는 아이처럼 굴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집착하거나 가면을 쓰며 살아가기도 한다.
부모는 이미 자신들의 과오를 잊은 듯 태연했고,
고모와의 관계마저 때때로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사람 같았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하다.
인정받고 싶은 갈망과,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린다.
웃음을 크게 보이면서도,
혼자가 되면 작은 실패에도 스스로를 가혹하게 검열한다.
이 습관은 불편하고, 나를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습관이 나를 여기까지 버티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나는 고모와 부모 사이에서 늘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살아남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흘러들어온 말의 파편들이 내 몸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나는 아직도 그 흉터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내가 누구였는지를 묻는다.
이제야 나는 안다.
자물쇠 사건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봉인이었고, 내 삶을 규정한 서막이었다.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청소년기는 그 봉인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었다.
나는 늘 위태로웠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빛처럼 떨며 살아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고백한다.
그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꺼질 듯 흔들렸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불빛 덕분에 나는 글을 쓰고, 질문을 남기며,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완벽하게 회복한 사람이 아니다.
상처는 여전히 내 뼛속 깊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상처를 글로 새기며,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 누군가에겐 평생의 그림자가 된다.
내겐 자물쇠가 그랬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태로움이 그랬다.
나는 오늘도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가.
혹은 당신의 등불은 지금 어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고백하며,
흔들리는 불빛을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가려 한다.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닿아,
“나도 그랬다”라는 공명을 일으킨다면,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