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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함애인통 (含哀忍痛)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다.

by 싱숭생숭

내 기억 속 식탁은 따뜻하지 않았다.

밥이 차려져 있어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이 끝나면 냉랭한 침묵만 남았다.

밥그릇이 탁자 위에 부딪히는 소리,

젓가락이 식탁에 닿을 때 나는 맑은 금속음,

그 소리들이 유일한 대화였다.

그러나 그 맑음은 위로가 아니라,

곧 폭풍이 터지기 전의 경고음처럼 느껴졌다.

나는 종종 배가 고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침을 걸렀다.

같이 밥을 먹는 순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식탁에 앉으면 반드시 잔소리와 핀잔이 따라왔다.

“왜 이리 목소리가 비실비실해?”

“남자 새끼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눈 똑바로 못 마주치냐?”

“왜 그렇게 떠서 쳐다보냐?”

무슨 대답을 하든 정답은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문제였고, 피하면 또 문제였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문제였던 셈이다.

이상하게도 아빠는 내가 어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빠는 내게 농담이랍시고 내뱉는 말들조차,

내게는 지옥이었다.

어느 날은 밥을 먹다 또 싸움이 붙었다.

억울함과 분노를 삼키다 못해,

나는 밥그릇을 통째로 입에 쑤셔 넣었다가

곧장 화장실에 달려가 변기에 다 토해냈다.

토해내는 소리는 내 절규였다.

“봐라, 이렇게까지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마저 “쇼”라고 치부했다.

내 몸이 보낸 신호는 언제나

과장, 징징거림, 주목받기 위한 연극으로 환원됐다.

그때부터 나는 집밥을 싫어하게 되었다.

쌀 냄새조차 역겨웠다.

밥솥 뚜껑을 여는 순간 퍼지는 김은

따뜻한 향기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언쟁의 잔향처럼 내 위장을 짓눌렀다.

아침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심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남은 유일한 빛은 고모였다.

그 집의 공기는 무겁고 숨 막혔지만,

고모 집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나도 잠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 따뜻함조차 부모의 눈에는 불편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고모를 원망했고,

엄마는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나는 고모와 연락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빛을 붙잡을수록, 나는 더 큰 그림자 속에 갇혔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께 자살 충동을 털어놓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숨겨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상담 선생님은 부모에게 곧장 알렸고,

부모는 태연하게 내 말을 무시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고모에게 기대게 되었고,

동시에 더 큰 죄책감을 떠안았다.

나는 늘 선택을 강요받았다.

“고모 집에서 살라.”

“고모를 엄마로 여기고 나가라.”

깔깔 웃으면서 내게 농담처럼 하던 말들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이런 말을 농담 삼아 할 수 있는지.

일말의 죄책감이 존재하지 않는지,

그 말들은 날마다 칼처럼 내게 꽂혔다.

빛을 붙잡을수록, 나는 죄인이 되어 갔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나는 서서히 찢어졌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늘 “내가 제일 힘들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해 소리치던 그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종종 혼란스러웠다.

정말 아버지가 불쌍한 걸까?

빚, 상속, 법정 싸움, 끝없는 갈등 속에서

그는 늘 피해자였다.

내가 기숙사에 있었던 동안 집 물건 곳곳에 빨간딱지가 붙여졌다며 말하던 그날,

나는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피해자의 얼굴 뒤에는

또 다른 가해자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변한 원인을 고모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전에 변해 있었다.

폭력적인 말, 술자리에서의 공포, 숨죽여 울던 밤.

그것들이 이미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술을 줄이고, 담배를 줄였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 눈에는 여전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자 코스프레 속에서 또다시 죄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무너진 것을 끌어안고 산다.

식탁의 기억,

조건부 사랑의 흔적,

고모와 부모 사이에서 느낀 모순,

아버지의 피해자 서사.

그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지만, 동시에 나를 만든다.

상처는 아프지만 익숙하다.

그 익숙함은 때로는 안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변화보다 상처를 붙잡는다.

나는 아직도 아침을 싫어하고, 쌀 냄새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 싫음조차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게 바로 포잔수결(抱殘守缺) ―

이미 무너진 것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삶이다.


나는 아직도 밥상 앞에 앉으면 몸이 긴장한다.

숟가락을 들기 전부터 목소리가 먼저 조여왔다.

“일찍 좀 일어나라. 그래야 다 같이 먹지.”

“내가 니 식모냐?”

그 말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었다.

그 말에는 늘 “너 때문에 힘들다”라는 숨은 비난이 따라붙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아침을 거의 먹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한 끼 두 끼를 거르다 보니,

몸은 저체중에 시달렸고 위장은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건,

‘집밥은 곧 전쟁’이라는 학습이었다.

집밥이 따뜻해야 한다는 상식은 나에겐 없었다.

나는 식탁에서 편안함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군대에서조차 밥상을 함께 하는 순간은 오히려 불편했다.

그들의 웃음 속에 감춰진 말,

핀잔이 튀어나올까 늘 불안했다.

나는 늘 침묵과 폭발 사이에서 흔들렸다.

침묵하면 “왜 대답이 없냐”는 말을 들었고,

답을 하면 “말투가 왜 그러냐”는 꾸지람이 따라왔다.

실어증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숨이 막히고, 목 안이 조여와 말을 잃었다.

그러다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면,

“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냐”며 또다시 꾸짖음을 들었다.


정답은 없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 잘못이었고,

나는 결국 잘못된 답만 고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때때로 나는 실성한 듯 웃었다.

집안이 싸움으로 가득할 때,

나는 미친 듯이 웃어버렸다.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내가 죽어야 한다”라고 실성한 채 다녔다.

아버지가 소리치며 막았다.

그 순간조차 “지금 뭐 하는 거냐”라고. 말려세웠다.

그리고선 내게는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 순간 이제 정신병원에 넣어주나 싶은 생각도 했지만 그들은 아무 대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형은 너만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며,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때가 있다는 말로 오히려 나를 자극시켰다.

형은 내 마음을 잘 알아줄 거라 믿었지만,

묘한 배신감이 몰려들어왔다.

나의 웃음조차 이해받지 못한 채,

또 다른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다들 내가 없어지길 바라서 이러는 거 아니냐”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가 이상해져 갔다.

아니, 미쳤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도 내게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더 괴로운 건 난 아픈 게 보였는데도,

그들은 나를 정상인으로 취급했다.

그게 너무나도 싫었다.

차라리 장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연기라도 해야지 그들이 나를 다르게 취급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은 내가 그저 집에만 있으면 참 착한 아이인데,

고모라는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망쳐놓은 거라고.

나를 더 자극시켰을 뿐이다.

고모는 언제나 내게 빛이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그 빛은 때때로 무거워졌다.

고모와의 관계를 부모가 싫어했기에,

나는 고모를 찾을수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대학에 와서, 나는 고모와 거리를 두려 했다.

예전의 고모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까워질수록 “이제는 그때의 고모가 사라진 게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부러 냉정하게 굴었다.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내 진심은 “멀어지기 싫다”였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상처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죄책감을 끌어안고 산다.

고모와의 관계도, 부모와의 상처도,

나는 놓을 수 없었다.

놓는 순간,

나의 일부도 함께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은 언제나 감옥 같았다.

외출을 하면 갈등은 사라졌다.

그러나 돌아오면 언제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웃음을 감췄다.

행복한 얼굴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행복해 보이면,

곧 “왜 웃느냐”는 말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늘 책상 앞에 앉아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공부만 잘하면, 상장만 많이 모으면,

가족은 나를 인정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조건부 사랑이었다.

잠시의 미소는 있었지만, 끝내 오래 남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돈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예민했다.

가정의 싸움은 언제나 돈에서 시작되었고,

돈에서 끝났다.

설날 아침에도,

제사 준비 중에도,

심지어 가족이 모여 웃던 자리마저도 돈 이야기가 끼어들면 곧바로 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누가 얼마를 썼다.”

“누가 상속을 더 챙겼다.”

나는 아직 경제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아이였다.

그러나 이미 ‘돈은 곧 분노와 결핍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돈을 쓰는 일이 버겁다.

무언가를 사려하면,

머릿속에는 계산기가 켜지듯 수치가 튀어나온다.

‘내가 이걸 사면 누군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이 돈은 언젠가 분쟁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돈은 나에게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자주 했다.

어린 나는 그 냄새만 맡아도 위장이 뒤틀렸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목소리는 커지고, 말끝은 날카로워졌다.

작은 일에도 화를 냈고,

그 화살은 종종 나를 향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그 모순이 더 무서웠다.

나는 전날의 상처를 붙잡고 있는데,

그는 이미 잊어버린 듯 행동했다.

“너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

그 말은 결국 내 감정을 무효화시켰다.

그래서 나는 술과 담배를 싫어한다.

남들이 가볍게 하는 음주와 흡연조차,

내겐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자극제가 된다.

“저 냄새 뒤에는 반드시 폭언이 따라온다.”

내 뇌는 그렇게 학습되었다.

형은 종종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내 고통을 가볍게 다루기도 했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죽고 싶었던 적 있어.”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절규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형과의 관계에서도 끝내 온전한 이해를 얻지 못했다.

남동생에게는 더 복잡한 감정이 있다.

나는 동생을 지키고 싶었고,

방으로 몰아넣으며 울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떠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마다 동생의 얼굴이 족쇄처럼 떠올랐다.

‘내가 사라지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은 나를 살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너뜨리기도 했다.

나는 가족 안에서 끝내 누구의 형제도,

누구의 자식도 온전히 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과거를 놓지 못하니?”

남들은 말한다.

“이제 다 지난 일이잖아.”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벗어나야지.”

그러나 나는 안다.

상처는 단순히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준다.

낯선 희망보다 익숙한 절망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고통은 아프지만, 동시에 익숙하다.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었다.

만약 상처마저 놓아버린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늘 증명해야 했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가 버려지지 않을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람 앞에서 더 크게 웃고,

더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나 혼자일 때는 작은 실수에도 무너진다.

“역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그 자책은 끝없이 반복된다.

조건부 사랑은 끝내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조건부 사랑이라도 갈망한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유일한 사랑의 형태였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여전히 부모를 연민한다.

그들도 미성숙했고, 그들도 결핍 속에서 자랐다.

그들의 선택은 나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그들도 자신을 파괴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들을 끝내 미워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고 이해해야 할까?”

답은 없다.

나는 아직도 그 경계 위에서 머물러 있다.

미움은 나를 갉아먹고, 연민은 나를 허무하게 만든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매일 흔들린다.


군대 가기 전 대략 2년 동안 어플을 사용하여 매일 일기를 작성했다. 이를 통해 모아 만든 56페이지 분량의 정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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