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묶고 스스로 괴로워함.
나는 매일 같은 단어로 하루를 연다.
“미안해.”
그 말은 내 입술에 걸린 족쇄였다.
숨을 들이쉬면 가슴이 저려왔고,
숨을 내쉴 때마다 미안하다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고모에게, 부모에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아무 상관없는 세상에조차.
아무도 내게 미안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를 향해 끝없이 읊조린다.
그것이 마치 살아남기 위한 의식처럼 굳어졌다.
고모의 메시지는 언제나 일정했다.
“우리 태현이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품격 있는 어른이 될 거야.”
짧고 따뜻한 문장.
누구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문장이 내 안에 닿는 순간,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지혜롭다고? 웃기지 마. 넌 이미 무너졌잖아.”
“품격 있는 어른? 아니야. 넌 아직도 아이처럼 울잖아.”
따뜻한 말이 닿는 순간,
죄책감이라는 가시가 동시에 솟아올랐다.
마치 가시덤불 속에 앉아 있는 느낌.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말하면,
그 말의 부드러움보다 내 살을 찌르는 가시의 통증이 더 선명해졌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만 되뇐다.
“고모, 미안해.
결혼을 늦게 한 것도,
아이를 낳지 않은 것도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고모의 젊음을 내가 빼앗아버린 것 같아.”
근거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이미 묶여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든 줄에, 내 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기묘한 방식을 택했다.
자존감을 지키려다,
오히려 스스로를 더 깊이 깎아내리는 방식.
사랑을 받으면, 곧바로 의심한다.
“이건 오래가지 않아. 언젠가 사라질 거야.”
칭찬을 들으면,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건 오해일 뿐이야. 곧 들통날 거야.”
따뜻한 손길이 닿으면, 단정한다.
“이 손도 언젠가 날 놓을 거야.”
나는 왜 이런 의심을 멈추지 못할까.
그 의심은 사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혹시라도 다 무너졌을 때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방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책은 나를 더 빨리 무너뜨렸다.
사랑을 믿지 못하니,
나는 스스로를 더 해치며 검증한다.
“그래, 나 같은 놈을 끝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일부러 모진 말을 내뱉는다.
상처를 주고, 거리를 두고,
다시 돌아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스스로를 해치면서까지 꾸며낸 이 방책.
나는 고등학생 때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인생〉을 보았다.
그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울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손등으로 아무리 닦아도 또 흘러내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 눈물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안의 결핍이 자극받아 터져 나온 것이었다.
마츠코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비틀고, 온몸을 흔들었다.
과장된 몸짓 뒤에는 단 하나의 바람이 숨어 있었다.
“아빠, 제발 나 좀 봐줘.”
나는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어릴 적, 조용히 있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크게 웃었고, 목소리를 과장했고,
리액션을 키웠다.
사라지지 않으려면, 나는 웃음을 부풀려야 했다.
그러나 웃음이 커질수록 내 안은 점점 공허해졌다.
내가 웃는 게 아니라,
웃음이라는 가면이 웃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나는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 순간, 눈물이 터졌다.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래도 봐주길 바랐어.”
“그래도 나는 웃어야 했어.”
그 교차의 순간, 나는 내 결핍을 똑바로 마주했다.
기쁨과 슬픔이 얽혀 분리되지 못한 채 흘러나오는 눈물.
나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묶는 걸까.
고모가 보내는 메시지를 보면서도,
마츠코의 장면에서 울면서도,
나는 결국 내 목에 밧줄을 걸어 조였다.
“사랑받고 싶다. “, “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모가 날 지켜준다.”, “그러나 고모의 젊음을 내가 앗아간 거다.”
“나는 감수성이 있다.”, “아니야, 이건 그냥 약해빠진 거다.”
나는 스스로 만든 줄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한 발은 사랑 위에, 다른 한 발은 죄책감 위에.
줄은 내가 묶었지만,
이제는 내가 풀 수 없는 매듭이 되어 있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
스스로 만든 밧줄에 스스로 옭아 매이는 삶.
그 말만큼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문장을 쓴다.
“고모, 미안해.”
그 말은 이제 주문이 되었다.
숨을 쉬듯 자동으로 반복되는 습관.
나는 여전히 사랑을 믿지 못한다.
여전히 결핍을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기록만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이 기록이야말로 내가 만든 줄을 잠시나마 풀어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고백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사랑을 받아도 불안하고,
사랑을 의심해도 결국 사랑을 갈망하는,
이 모순된 삶.
나는 끝내 풀리지 않을 매듭 속에서,
오늘도 내 문장을 이어간다.
나는 늘 사랑을 방패 삼아 막으려 했다.
“언젠가 떠날 거야.”
“이건 오래가지 않아.”
이런 말들은 방패였다.
그러나 그 방패는 곧 칼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던 방식이,
결국 나를 더 깊게 다치게 만들었다.
예컨대 고모가 내게 용돈을 주었을 때,
내 반응은 기쁨이 아니었다.
“이건 갚아야 할 빚이다.”
“이건 나를 구속할 족쇄다.”
누군가의 선의가 내게 닿는 순간,
나는 그것을 곧바로 빚으로 전환시켰다.
기쁨은 죄책감으로 바뀌었고,
따뜻함은 족쇄로 변했다.
나는 늘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그 방패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결국 나 자신을 찌른 셈이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인생〉 속 장면은 여전히 내 뇌에 각인돼 있다.
마츠코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
관객은 웃을지 몰라도 나는 울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어릴 적,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일부러 더 시끄럽게 굴었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소심함을 숨기려고,
내 존재를 크게 보여주려고 몸짓을 과장했다.
그러나 웃음이 커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건 내가 아닌데.. 나는 어디에 있지?”
내 진짜 목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웃음 뒤에는 절규가 있었다.
나는 웃으며 동시에 속으로 울었다.
그 모순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내 몸은 매일 그 모순에 찢겨 나갔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결핍은 단순히 사랑의 부족이 아니라,
사람을 연극배우로 만든다는 것을.
나는 무대 위 배우처럼 늘 가면을 쓰고,
대사를 읊조리며, 웃음을 연기하며 살아야 했다.
그 연극은 내게 삶이 아니라,
느리게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물었다.
“왜 사랑을 믿지 못하니?”
그 질문의 대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주어지는 순간 곧바로 사라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마치 눈앞에 놓인 빵을 보면서,
곧 누군가 빼앗아갈 거라 단정하는 것.
그래서 나는 빵을 잡기도 전에 이미 공허해졌다.
누군가 나를 껴안으면,
나는 동시에 그 품이 곧 사라질 것을 떠올렸다.
따뜻함은 순간이고,
그 뒤에는 반드시 차가움이 온다고 믿었다.
사랑이 닿는 순간조차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공포 속에서 나는 사랑을 스스로 거부했다.
그러고는 다시 후회했다.
“왜 또 밀어냈을까. 왜 또 못 붙잡았을까.”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나는 스스로 만든 줄에 더 깊이 묶였다.
자승자박.
스스로 묶고 스스로 고통받는 이 사자성어는
겉으로는 어리석음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에서 묘한 위안을 느낀다.
왜냐하면, “스스로 묶었다”는 말속에는
“언젠가는 스스로 풀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줄에 묶여 있지만,
그 줄은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남이 채운 족쇄가 아니라,
내 손으로 매듭지은 밧줄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내 손으로 그 매듭을 풀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가능성이야말로 내가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였다.
글은 곧 매듭을 푸는 시도였다.
완벽히 풀리지 않더라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미안하다고 되뇌고,
여전히 결핍을 붙잡고,
여전히 자책을 반복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쓰는 이 기록들이 바로,
내가 묶어둔 매듭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
글은 내게 치료가 아니다.
치료라는 말은 너무 단정적이고,
마치 완치를 기대하는 것처럼 들린다.
글은 오히려 “나는 아직 묶여 있다”는 고백이다.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그 고백과 증언이 쌓일수록
내 안의 매듭은 조금씩 풀린다.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더라도,
숨 쉴 틈은 만들어진다.
나는 그 숨틈 속에서 또다시 하루를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