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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명지서 (絶命之書)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글.

by 싱숭생숭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서를 썼다.

남들은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품에 안고 잠들었을 때,

나는 몰래 공책을 꺼내 빈 페이지에 내 흔적을 남겼다.

부모의 말과 행동은 종종 내 마음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사소한 말이라도 내게는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탓하는 습관이 자라났다.

“내가 문제라서 그렇겠지.”

“내가 더 착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내 속에서 자라난 단어들은 결국 종이 위로 흘러나왔다

연필심의 거친 마찰음,

가끔은 종이를 뚫을 만큼 강하게 눌러쓴 자국.

내 안의 고통은 유서라는 형태로 남겨졌다.


유서는 내게 단순한 죽음의 문이 아니었다.

숨이 막힐 때마다 겨우 열어둔 숨구멍이었고,

내 존재의 흔적을 남기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 유서를 올려두었다.

누가 보더라도 숨길 수 없는 자리였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알아달라”는 외침이었다.

혹시라도 부모가 그 글을 본다면,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손 내밀어주지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의 작은 희망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부모의 눈빛은 차가웠고,

나는 또다시 유서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조각난 종이와 함께,

내 안의 희망도 함께 찢겨나갔다.

다른 날엔 책 속 깊숙이 숨겨두었다.

교과서의 뒤 표지와 노트 사이,

절대 쉽게 찾을 수 없는 틈바구니에 몰래 끼워두었다.

겉으로는 “숨겼다”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언젠가 발견되기를 바랐다.

지금은 말할 용기가 없었지만,

내가 사라지고 난 뒤라도 누군가 우연히 발견한다면,

그때는 비로소 내 감정이 전해지리라 믿었다.

그 믿음이야말로 내 유서의 역설이었다.


나는 심지어 죽음 이후의 장면까지 상상했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서랍을 열고,

내가 남긴 책과 노트들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 낀 손끝으로 넘기는 모습을.

내 짐을 정리하다가,

불 속에서 우연히 유서가 발견되기를 바랐다.

마치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숨겨진 암호 같은 글씨들이

재 속에서 반쯤 타다 남아 있는 광경을 떠올렸다.

불길이 모든 것을 삼켜도,

검게 그을린 종잇조각 하나만이라도 남는다면,

그것은 내 절규의 증거가 될 거라 믿었다.

그 작은 파편에 새겨진 삐뚤빼뚤한 글자들은,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흔적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상상했다.

누군가가 그 검게 탄 조각을 조심스레 펼쳐 보며,

거기에 적힌 절규를 읽고

잠시라도 내 고통을 이해하는 장면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더 이상

철저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살아서는 끝내 닿지 못한 내 진심이,

죽음 이후라도 타인의 눈에 비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될 거라 생각했다.

설령 그 의미가 단 한 사람의 가슴속에

짧은 파문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그 역설적인 바람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더 강하게 삶을 붙잡고 있었다.

유서를 쓰는 손끝은 죽음을 향한 기록 같았지만,

실상은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더 강렬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뒤돌아보면,

그 처절한 습관은 나를 지금의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종잇조각마다 새겨진 언어가

오늘의 나를 빚어낸 뿌리였다.

비극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그 글들은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나는 어릴 때 이미

감정을 언어로 붙잡는 훈련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 흔적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근원이 되었다.

나는 한동안 세상을 단순하게 믿었다.

겉과 속이 다를 리 없다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명확히 갈릴 거라고.

그러나 가족 안에서의 경험은

그 믿음을 계속해서 무너뜨렸다.


아버지는 늘 세상을 원망했다.

돈은 언제나 부족했고,

사람들은 언제나 변덕스러웠으며,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배신한다고 말했다.

그 말투는 단호했고, 때로는 고발문 같았으며,

어린 내가 감히 반박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처럼 들려왔다.

고모와 할머니는 변했다고 했다.

언제는 내 편 같다가도,

언제는 등을 돌리는 존재라 했다.

삼촌은 무책임한 어른이라 규정했다.

“세상은 늘 우리를 배신한다.”

그 문장은 마치 가훈처럼 내 귀에 새겨졌다.

그 말에 갇힌 나는,

세상은 애초에 신뢰할 수 없는 곳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언어만이 유일한 현실인 줄 알았다.

그의 말은 법이었고, 그의 시선은 렌즈였다.

나는 그 렌즈를 통해서만 사람을 평가했고,

그의 언어를 되뇌며 나의 세계를 구성했다.

다른 가능성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 언어에 질문을 던지려 했다면,

그 화살은 곧장 내게로 돌아왔다.

“왜 네가 의심하느냐.”

“네가 나를 배신하는 거다.”

나는 질문을 삼키는 법을 배웠고,

의문은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침묵 속에 살았다.

교실에서 친구들이 자유롭게 묻고 대답하는 순간에도,

나는 조용히 목구멍을 움켜쥐듯 침묵했다.

밥상 앞에서 다른 생각이 스치면,

혀끝까지 올라온 단어들을 억눌렀다.

혹여라도 잘못된 질문을 꺼내면,

가족의 화살이 나를 겨눌 거라는 두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그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목소리가 파도처럼 부딪히며 되돌아왔지만,

밖으로는 결코 흘러나오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은 쌓이고 쌓여,

결국 종이 위에만 겨우 흘러넘쳤다.

나는 낮에는 말을 삼켰고,

밤에는 글로 토해냈다.

침묵이 남긴 건,

결국 또 다른 유서의 흔적들이었다.

그 유서들은 말하지 못한 질문들의 그림자였다.

“정말 세상은 모두 배신할까?”

“어른들이 말하는 진실만이 유일할까?”

나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질문들을,

유서라는 비밀스러운 틀 안에 새겨두었다.

그 침묵과 기록의 공존이야말로,

어린 시절 나의 모순이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했지만,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언어를 쏟아냈다.

말할 수 없던 아이는,

결국 더 절박하게 글을 쓰는 아이가 되었다.


유서는 내게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타인을 향한 신호였다.

“알아달라.”

“살려달라.”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그 말들은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처럼,

내 안에서만 맴돌다 종이 위에 눌러앉았다.

내가 쓰던 문장은 사실 죽음을 향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겨우 주장하는 SOS 신호였다.

이제 블로그 글도 그렇다.

누구도 보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오늘도 글을 남긴다.

밤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모니터 위에 새겨지는 검은 활자,

그것이 내 호흡의 리듬이 되었다.

이 흔적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내 글은

내가 남긴 또 다른 유서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둔 기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렇기에 글은 언제나 모순적이다.

죽음을 불러들이면서도,

삶을 기어이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유서를 흔적으로 남겼다.

죽음에 기댄 기록이었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기록은

내가 사라지고 싶다고 쓰면서도

결국 살아남겠다는 무의식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흔적을 다시 정의하고 싶다.

흔적은 더 이상

사라짐의 표시가 아니라,

남겨짐의 증거다.

흔적이 있다는 것은,

내가 끝내 흔적을 남기려는 의지를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을 상상하며 쓴 어린 날의 글은

결국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남기는 글은

앞으로의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된 기록이,

아이러니하게 삶의 토대가 된 것이다.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다.

때로는 글조차 내게 배신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글만이 내 편이 되어준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하다.

내가 쓴 글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버림받은 건 내가 아니라,

사실은 나를 버리려 했던 그 시도들이었다.

나는 상처 난 글 위에 다시 글을 쓰며,

찢어진 흔적 위에 또 다른 흔적을 덧입혔다.

그렇게 이어진 기록이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남긴다.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설명은 언젠가 무너질 수 있어도,

흔적만은 무너지지 않고 남기 때문이다.


나는 쉽게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기억의 파편들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은 오래 붙잡아두고 싶었고,

나쁜 기억은 어떻게든 잊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은 내 뜻대로 남지 않았다.

결국 남은 것은 상처와 결핍이 묻은 기억뿐이었고,

물건은 그것들을 지워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정리하지 못한 방 안의 물건들은 곧 내 안의 혼란을 닮아 있었고,

좋은 추억의 흔적은 어느새 집착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나는 물건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사라질까 두려운 나 자신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의 유서는

죽음을 향한 기록이었지만,

지금의 글은 삶을 향한 작은 발화다.

나는 여전히 모순적이다.

죽음을 꿈꾸면서도 삶을 갈망하고,

사라지고 싶어 하면서도 흔적을 남기려 한다.

그러나 그 모순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삶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

그 모순 속에서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는 사실.

어쩌면 1장의 이야기는

단지 흔적을 찾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이제 나는,

그 흔적 위에서 다시 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다음 질문을 던진다.

“흔적을 넘어, 나는 어떤 삶을 만들 것인가.”

“나는 이제 어떤 언어로, 어떤 존재로 살아남을 것인가.”


중학교 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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