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미희를 만났다.
경희는 신혼 여행 잘 다녀왔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겨울과 미희는 경희의 사진을 보면서 열심히 뒷담화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신혼여행이라지만 너무 노출 심한거 아니냐는 등, 식장에서 본 아름다운 신부는 어디 있냐는 등..둘이서 깔깔대고 웃다가 미희의 핸드폰 알람에 놀라 시간을 본다.
벌써 2시야?
그래. 내가 이럴까봐 알람 맞췄잖아. 빨리 가자. 오늘은 무려 인상파라고..
미희는 화가를 사랑하는 친구였다. 중학교 때부터 미술 시간이 좋았다고 한다. 그림에도 꽤나 소질이 있었지만 미대를 진학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래도 취미삼아 그림도 그리고 미술관 쫓아다니고 한 게 20년 가까운 세월이다. 남자 친구를 미술관에서 우연히 사귈 수 있다면 좋겠다는 환상을 품고 산다.
겨울도 그런 미희를 쫓아 미술관, 전시회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겨울도 어느새 좋아하는 화가도 생기고 서점에 가면 미술 관련 코너에서 꽤 오랜시간 머물곤 했다.
겨울과 미희는 모두 인상파 화가들을 좋아했다. 그들의 빛과 색에 대한 열광에 열광했달까..
처음에는 같이 한작품 한작품 뜯어보며 대화도 나누고 하다가 미희는 어느새 저 멀리 르누아르를 보러 앞서갔다.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서도 좋아하는 최애 가수를 더 보고픈 마음을 알기에 겨울은 미희를 보고 웃었다. 그러면서 겨울은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씨. 뭐 봐요?
여름은 조금 늦게 도착해서 어떻게 해명 할까 고민하며 뛰었는데 겨울이 서운한 기색 없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여름씨. 현수막 펄럭이는 거 보이죠? 인상파 화가들 전시회 하네요.
아..그러네요. 저 그림..우산을 들고 있는 여자..였나요? 누구였더라..모네였나..마네였나..
겨울은 웃었다. 10여년 전 미희와 나누었던 장면이 오버랩됐기에.
여름씨. 우산도 아니고 양산도 아니고 파라솔이네요..작가는 모네구요. (웃음)
아..죄송..차라리 입 다물면 중간이라도 갔을텐데 (웃음)
아네요. 그래도 얼추 비슷했잖아요. 미술 관심 갖기 전의 저보다는 훨씬 나으세요. (웃음)
겨울은 미희의 미술에 대한 열정. 자신과 경희가 미희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감상했던 그림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모네에 대한 자기의 애정. 그런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여름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손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동그란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엄지와 검지를 집어 오케이 사인을 만든 손을 허공에 돌리는 식이었다.
여름은 겨울의 손동작을 보곤 이야기가 길어질 걸 직감했는지 한 손을 턱에 괴고 겨울을 감상했다. 무엇인가 즐겁게 얘기할 때의 겨울은 빛났다. 넋을 놓고 볼 정도로.
네..그렇게 된 거네요. 하고픈 말을 얼추 마치자 겨울은 웃으며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겨울씨의 최애 작품이 파라솔 여인이 됐고..
파라솔을 든 여인이요..
네. 파라솔을 든 여인이 됐고..아..근데 저도 갑자기 기억나는게 그 파라솔 여인이 아니, 파라솔을 든 여인이 모네의 연인이었던 것 같아요..이름이 뭐였더라..클로드였나..
카미유요..클로드는 모네...클로드 모네..
저 얘기 안할게요..
여름의 삐진 듯한 말투에 겨울은 겨우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도 민망함과 즐거움이 교차된 웃음을 머금었다.
까미유는 연인이자 부인이었죠. 여름씨 포스터 잘 보여요? 바람에 나부껴서 잘 안보일텐데 뒤에 보면 아이가 한 명 있거든요. 장이라고..아들이에요. 가족의 행복한 한 때를 거장의 재능으로 그려낸거죠.
이즘으로 치면 놀이동산 가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내와 아이를 사진 찍은 셈이군요.
맞아요. 이즘이랑 다른 점은 아이보다는 아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점 정도?
그러네요. 이즘의 가족 사진엔 항상 아이들이 중심이죠. 엄마는 주변. 아빠는 사진 찍느라 아예 안보이고.
까미유는 행복했겠네요. 비록 저 그림 이후 몇 년 살지 못했지만..여름씨 말대로 모네는 수련 연작으로 정말 유명하잖아요? 파라솔 여인은 몰라도 수련 연작은 한번씩은 봤을 정도니. (겨울은 파라솔 여인이라 강조해서 말하곤 웃었다.)
근데 제 개인적으론 파라솔 여인이 훨씬 좋아요. 마치 그 때가 모네의 화양연화 같아서요..수련 연작에서는 거장으로서의 모네가 보인다면 파라솔 여인에서는 몽마르뜨 언덕의 배고픈 예술가, 가진 거라곤 사랑 하나뿐인 청년 모네가 보이거든요.
겨울은 자신이 아직 젊어서인지 여전히 몽마르뜨를 지베르니보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여름은 엉뚱하게도 친구 영수가 생각났다.
겨울씨. 제 친구 영수라고 기억하세요?
아..삼총사 중에 얼굴 마담이신 분이요? 알죠. 아라미스..개인적으로 궁금한 분이에요. (웃음)
네..그 친구가 중학교 때까지 축구를 했거든요. 학교 대표였고..전도유망한 선수였죠. 돌연히 운동을 접고..고등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됐는데..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그치가 얼마나 날라다녔을지 상상이 되시죠? 우리에게는 거의 메시 같았어요. 대여섯명이 붙어도 상대가 안됐죠. 녀석 입장에서는 시시할만도 했을텐데 거들먹거리거나 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땀을 한바땅 쏟고 나서 녀석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축구 왜 그만뒀냐고.
겨울은 집중해서 들었다. 예전부터 삼총사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다.
초등학생 때부터 자기의 심장은 푸른 잔디 위에서만 뛰었대요. 공부건 이성이건 다른 건 다 시시했다고..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 차는게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잼있었지만 나머지 인생을 걸만큼, 심장이 오직 그곳에서만 뛰지는 않는, 그런 상황이 된거죠.
녀석은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 직원이 됐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는 느낌은 없대요. 여전히 찾고 있다고..
여튼..고등학교 때 그 친구 얘기 듣고 충격받았거든요. 그 표현에요. 자신의 심장은 오로지 푸른 잔디 위에서만 뛴다는..아까 겨울씨가 화양연화 얘기했잖아요? 저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들리는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영수의 중학 시절..모네의 몽마르뜨 시절..그런 시절들이요..
영수씨..멋있네요.
네 그 녀석 지금은 조금 한량같이 살고 있는데..속은 깊은 친구에요..(웃음)
그 날 여름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모네의 작품 앞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 기억하려고 애쓰는데 미희가 저 끝에서 경희를 불렀다. 르누아르의 '피아소 치는 두 소녀'가 여기 있다며.
자리를 뜨려던 순간 떠올리고자 했던 여름의 그 날 음성이 귓가를 때렸다.
겨울씨. 제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젠지 아세요? 제 심장이 미친듯이 밤낮으로 뛰고 있는 이즘..겨울씨와의 나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