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한 날이 왔다.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았던 두 사람. 처음 대화했던 날 전통 찻집 앞에서 다음 약속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실컷 얘기하고 싶다는 여름의 간청에 겨울이 응답하여 주말인 일요일로 정했다. 벚꽃이 흐드러질 무렵이었다. 여름은 겨울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인 2시보다 무려 2시간을 먼저 와 기다렸던 여름. 마지막 만남을 앞두고 이토록 설렐 수 있다는 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전통 찾집에서 만난 날 여름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들면..어느 영화에서마냥 깨어났을 때 다른 세계로 와 있을 것 같은 불안에.
여름이 겨울을 기다리는 동안 세계는 정지한 듯 고요했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잡음은 더더욱 묻혔다. 여름은 최대한 집중했다. 먼 발치에서 겨울이 오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그녀의 주변에 흩날릴 때 여름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하늘이 허락한 인연이라면 다시 그녀를 보내줄 것이다. 지금은..그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보낸다. 어떤 흔적이나 연락도 남기지 않고. 여름의 비장함을 겨울이 먼발치에서 느꼈는지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이르자 안부부터 물었다.
여름씨. 괜찮아요? 어디 아프거나 그런거 아니죠? 표정이 굳어 보여서..
아..네. 그럼요. 겨울씨. 저 괜찮습니다. 오늘 좀 긴장되서요.
(웃음) 다행이에요. 전 우리가 연락처 교환을 안해서 아픈데도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오신건가 걱정했어요. 긴장 푸세요. 오늘은 우리 마지막으로 실컷 즐기기로 한 날이잖아요.
(웃음) 맞아요. 겨울씨 말이. 이렇게 긴장해서 보내는 1분 1초도 아깝네요.
둘은 여의도 공원을 돌면서 그간 어떻게 자랐는지, 부모 형제나 친구 관계는 어떤지, 좋아하는 연예인부터 즐겨듣는 음악까지 생각나는대로, 맥락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야기가 때로는 산에서 산으로, 산에서 바다로 정신 없이 이어져 감을 못잡을 때면 상대방은 잠시만요..를 외치며 기어코 이해한 후 다음 이야기를 진행했다. 마치 1년치 오갈 대화를 오늘 모두 끝내겠다는 심산인 건지..두 사람의 대화는 데이트라기 보다는 무한의 정보 교환처럼 느껴졌다.
아..잠깐만요. 여름씨. 그러니까 옛날 로맨스 영화는 웬만한 건 다 보신 거군요. 그것도 한두번도 아니고 적어도 네댜섯번 이상씩.
네. 그냥 취미죠. 아니 차라리 ASMR에 가깝죠. 노동요이기도 하고. 집에서 혼자 있는데 청소라도 할라 치면 영화 틀어놓는 거에요.
와..저도 옛날 영화, 드라마, 쇼프로 좋아하는데 여름씨한텐 못당하겠어요. 웬만해선 다 봤는데 대부분 한 번 보고 말고..진짜 공감하고 즐겼으면 한번 정도 더 보려나..그러니 누가 그 영화 알아? 라고 물으면 어..알아. 봤었어.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기억날듯 말듯..그렇게 되는거죠.
그것만해도 대단한거에요.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겨울씨도 그런 거 못느꼈어요? 뭔가에 대해 얘기하고픈데..나만 알고 있어서 대화가 안될 때의 아쉬움 같은.
맞아요. 생각해보니 그런 때가 종종 있었어요. 제가 얘기를 꺼내도 받아줄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에서 빠져버리는. 그 땐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쉽네요. 여름씨 같은 분 한 명만 있어도 완전 신났을텐데..
제 최애 영화가 티아 레오니,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패밀리맨이거든요.
아..알아요. 그것도 90년대 영화죠? 전 OTT에서 봤지만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로코 영화는 이제 아무도 영화관에서 안보니까..시대를 잘못 만난건지. (웃음)
완전 공감하구요. 아..시대 얘기 나오니 우디 앨런 감독, 오웬 웰슨 주연의 미드나잇 인 파리도 기억나는데..아..이건 좀 있다 얘기하고..아까 뭐 얘기하다 말았죠?
패밀리맨이요. 최애 영화. 저도 그 영화 보고 티아 레오니한테 완전 반했죠. 그 전에 코미디영화 어디 나왔었는데..
아마 나쁜녀석들인가..투캅스 느낌의 코믹액션 영화였을거에요. 기억이 맞다면..
아..그랬던 것 같아요. 포스터 기억나요. 세 명이 전면에서 걸어오는..
흥분한 듯 두 팔을 휘젓는 겨울을 보며 여름은 크게 웃었다.
(웃음) 아..그래서요? 자꾸 딴 얘기 해서 죄송. 하고픈 얘기가 넘쳐요.
아..딴 건 아니고 영어요. 겨울씨한테 했던. 오늘 그 이유 들러주기로 했잖아요.
아..맞다. 우리 정신없이 딴 얘기만 하고 있었네요. (웃음) 이제 진짜 집중할게요.
제가 너무 좋아하다보니 그건 최소 열 댓번은 봤을 거에요. 특히 마지막 장면 기억해요? 파리로 떠나는 케이트를 잡고 잭이 하는 말..그 긴 대사를 제가 영어로 외우고 다녀요. 제가 본 어떤 영화의 프로포즈보다 멋졌던..최고의 프로포즈였죠. 그 대사 중 하나에요. 커피 한 잔만..그게 원하는 전부라고..오늘 밤만은 파리로 떠나지 말라고..그 날 그 대사 중 일부 얼결에 겨울씨에게 한거에요. 영화의 기운이 통하길 기도하면서..(웃음)
여름은 갑자기 길을 멈추고 겨울을 바라보았다.
겨울씨. 계속 만날 사람이라면 민망해서 절대 못했겠지만 내일은 없는 우리니 용기내서 연기해볼게요. 겨울씨는 마지막에 오케이 잭..그렇게 한마디만 해주시면 되요. 준비됐죠?
겨울은 대학 재학시 원어 연극부 출신이었다. 그걸 여름이 알 리는 없었지만. 영어로 오케이 잭..한마디만 하면 되는 건데 순간 왜 이렇게 긴장이 됐는지 겨울은 알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 몸의 실핏줄이 팽팽해지는 듯한 긴장이 전신을 감쌌다.
시작할게요. 여름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겨울의 눈을 바라보았다.
You see, you're a better person than I am, and it made me a better person to be around you.
여름이 첫 대사를 하자마자 겨울은 정신이 아득했다. 정신없이 대사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I don't know. Maybe it was all just a dream.
Maybe I went to bed one lonely night in December, and I imagined it all, but I swear, nothing's ever felt more real.
And if you get on that plane right now, it'll disappear forever.
I know we could both go on with our lives and we'd both be fine. But I've seen what we could be like together. And I choose us.
겨울은 여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Please Kate. One cup of coffee. You can always go to Paris. Just please, not tonight.
Okay Jack. 겨울이 대답했다. 정확히 그 시점이었다.
Okay. 여름이 환하게 웃었다.
행인들 몇이 신기한듯 쳐다봤지만 여름과 겨울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진짜 무대 위에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여름씨. 저 정말 감동했어요. 겨울은 좀전의 장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여름을 쳐다봤다.
(웃음) 한 번 더 만난 가치는 충분했죠? 보니까 겨울씨는 다 알아듣는 표정이네요. 영어 잘 하시나봐요.
여름씨도 잘 하던데요? 발음도 너무 좋고..
(웃음) 저게 다에요. 언젠가 제 짝이 될 사람에게 쓰려고 열심히 연습한건데..내일이면 남이 될 겨울씨에게 쓰네요.
(웃음) 연습하셨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연습상대 아닌가요?
최고죠. 충분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배우가 제 앞에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잭이 고백할 때 케이트 표정 변화가 압권인데..겨울씨 진지하게 듣다가 조금씩 굳은 얼굴이 펴지며 마지막에 살짝 웃으며 대사하는데 진짜 테아 레오니 뺨쳤습니다. 소름 돋았어요.(웃음)
겨울과 여름은 커피를 한 잔 했고 저녁을 같이 먹고 다시 또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카페 문을 열고 나온 두 사람.
겨울은 손을 내밀었다.
친구하자고 하면 거절하시겠죠?
여름은 겨울의 손을 잡았다.
네..전 겨울씨를 친구로 둘 바에는 그냥 헤어지는 걸 택하겠습니다. 친구로는.. 지낼 수 없어요. 제 마음이..그럴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아뇨. 그럴 것 같아 묻지 않았던거에요. 여름씨 마음 이해해요.
두 사람은 잡았던 손을 놓았다.
겨울은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으로 살짝 닦아내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완벽한 하루였어요. 많이 감동했고..행복했어요. 여름씨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꼭 잘되실거에요. 제가 응원할게요.
네..저는..저도..감사했어요. 요 몇 달 겨울씨의 존재 자체에..행복했습니다.
시선을 땅에 떨군 여름을 겨울은 꼭 안았다. 여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울어선 안된다고 이를 악물고 참는 듯 했다..
겨울은 떠났다. 저 멀리까지 손을 흔들며. 여름은 한참을 서 있다가 발걸음을 뗐다. 내일이면 차가운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행복은 잠깐 맛보기(a glimpse)일 뿐 영원할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