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다른 이름, 선택

by 정자까야

미안해. 나 때문에 멀리까지 오고. 겨울은 기다리고 있던 미희를 보자 반사적으로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니 덕에 여의도 구경하는거지 뭐. 미희는 별 거 아니란 듯이 말하다가


한가한 내가 와야지 어쩌겠니. 라고 새침하게 굴어 겨울을 웃게 했다.


봄이라 바빠지기 시작했어. 기업들 실적 시즌이기도 하고.


겨울은 물을 마시며 싱긋 웃었다. 미희도 바쁠텐데 점심이라도 먹자며 부러 와주어 고마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경희 본지 꽤 된 것 같다. 미희가 말했다.


얘는. 우리 셋이 지난달에도 봤어. 여름씨 광화문에서 본 거 한달도 안됐는데..


그랬나. 경희 미혼일 때는 하도 붙어다녀서 그런가..이즘 두어달에 한 번씩 봐도 왠지 오랫만에 보는 듯해 슬프네..


미희가 우는 표정을 지어 겨울은 되려 웃었다. 미희는 잔 정이 많은 친구였다.


겨울아. 넌 결혼해도 남편 눈치 보지 말고 살아라. 너마저 그럼 난 어떻게 살아..


미희의 푸념에 겨울은 경희를 대변했다.


남편 눈치 보는게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거지. 이제 갓 결혼했는데..상대의 의견이나 감정을 살피는 건..당연한 것 같아. 경희 걔가 누구 눈치볼 성격이니..


하긴. 네 말이 맞겠다. 너도 곧 결혼할테니 내가 혼밥하는 건 시간 문제겠네.


겨울은 밥 먹으랴 웃으랴 바빴다. 혹시 아니. 내가 그리 될지. 겨울의 말에 미희는 피식 웃었다. 퍽이나..그러시겠다. 핀잔을 날리며.


세 사람 성격이 제각각이라 만날 때 좀 헷갈리거나 그러지 않아? 너 나름 중심잡고 사는 거 보면 용하다. 미희의 말에


사실 가끔 혼동되긴 해. 특히 가을씨 만나고 바로 다음 날 여름씨 만날 때. 봄이는 그래도 두 사람 성향이 언뜻언뜻 보이는데 둘은 공통점이 별로 없어서. 겨울은 잠시 세 사람을 떠올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야 둘 다 한두번 본게 전부니 잘 모르지만..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 그러더니 미희는 뭔가 생각난듯이 덧붙였다.


있잖아 겨울아. 오늘 너 만나러 오는데 지하철에서 젊은 커플이 하는 얘기 우연히 들었거든. 여자애가 남자한테 물어보느거야. 자기 만나기 전 마지막 키스가 언제였냐고. 남자는 기억이 잘 안난다며 둘러대고 여자애는 추궁하고..잼있더라구. 겨울이 너도 세 남자한테 물어보면 어떨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궁금하지 않아?


겨울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들려준 대답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난 못해. 우리가 무슨 10대도 아니고.


아니 왜. 그게 어때서? 잼있잖아. 미희가 언성을 높여 항의했다.


미희야. 네가 3자니까 잼있는거야. 가을씨? 그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얘길 해? 절대 못해. 겨우 용기내서 물어도 돌아올 답이 예상돼서 싫어. 봄이? 봄이한테도 못하겠어. 여전히 친한 동생 같은데..오글거리는 느낌이라 못 물어보겠어. 그리고 봄이 대답도..예상이 돼서..말끝에 겨울은 웃었다.


여름씨는? 미희가 물었다.


여름씨는..여름씨는..적당한 분위기만 되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거엔 거리낌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도 궁금하기도 해. 어떤 답이 돌아올지 짐작도 안돼. 늘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 겨울은 여름을 떠올리곤 웃기부터 했다.


두 사람한텐 못하고 기대도 안된다..한 명한텐 할 수 있고 기대된다..그냥 여름씨랑 사귀는게 낫지 않아? 미희의 돌직구 질문에 겨울은 얼굴이 붉어졌다.


결혼이란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고민도 안했겠지..여름씨랑 만났을거야. 아마도. 여름씨가 엄마의 성화와 독기를 이겨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겨울은 미희를 보며 조금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런 얘기. 상대가 미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겨울은 비교적 솔직하게 속내를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나도 그들을 연애 대상으로만 볼 수 없어. 다른 차원으로 가는거고..그들이 걸고 있는 선택의 무게 만큼이나 나도.. 책임감을 갖고 임하고 있어. 엄마의 마음? 그게 제일 중요한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냐. 엄마와 척을 지고 산다는 건 내겐 고통스런 가정이야..그런 일이 없으면 해. 진심으로.


겨울은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 했다. 미희는 여름일거라 짐작했다.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그런 것들이 모두 중요해. 만날 때 즐겁다고 동반자가 돼 달라고 할 순 없을거 같아. 너무 복잡한가? 겨울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맘에 안드는 표정이었다.


의외로 진지한 겨울의 모습에 미희는 놀리기를 멈추고 친구의 고민을 경청했다. 지근거리에서 늘 지켜본 친구지만 겨울의 미래가 어떨지 좀처럼 그려볼 수가 없었다. 미희로서는 겨울이 가을이나 여름 둘 중 한 명을 택하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봄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후식으로 커피가 나왔다. 미희는 감탄했다. 이즘 후식까지 주는 곳이 별로 없다며.


이동하는 시간도 아깝잖아. 더 얘기 나누다 가야지.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우리 팀장님이 팀 회식 하자고 데려간 집이 퓨전중식 식당이었는데 처음엔 맥주 마시고 그러다가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니까 상을 한 번 물리더니 다른 메뉴로 소주 2차 바로 시작하더라. 미희는 그 때를 떠올린듯 웃으며 말했고 겨울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잼있는 분이시네. 자리 옮길 시간도 아까운 애주가셨나..겨울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미희야. 난 가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상상력 같다는 생각도 들어.


겨울의 말에 미희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테이블을 바꾸자 펼쳐지는 다른 세상. 현실은 같은 공간이지만 같은 공간이 아니라는 상상력. 지금 우리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여의도 공원이 아니라 가령..광안리 바다라든가 뉴욕 센트럴파크라고 여길 수 있는 상상력. 너와 난 잠시 후 헤어져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지금 공항으로 출발할 거고 거기서 경희를 만나 유럽으로 보름간 여행을 다녀올 거라는..그 첫 날의 시작이라고 여길 수 있는 상상력..그런 능력이 있다면 현실이 조금 팍팍해도 견디며 나아갈 수 있을까 싶은거지.


로맨틱한 얘기야. 커피를 든 채 미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아니다. 미희가 말을 하려다 말자 겨울은 웃으며 미희를 재촉했다. 말해. 뭔데?


아니..너도 느끼겠지만..그 로맨스는 환상이니까. 잠깐씩 일어날 순 있어도 곧바로 현실이 엄습하니까..너 야구나 축구 안보지? 스포츠에는 그런 말이 있대. 공격은 관중을 부르지만 수비는 우승을 부른다는..


겨울은 미희의 비유에 감탄했다. 커피를 내려놓고 미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격은 화려함이야. 로맨틱하지. 관중은 그 로맨스에 열광하는거고. 하지만 수비는? 지루해. 방어는 확실한데 뭔가 한방이 없어. 하지만 결국 우승하는 팀은 그 팀이거든. 개인의 인생을 길게 보면..로맨스를 매 순간 기대할 순 없는거지. 기적같은 순간이 몇 번이나 찾아올까. 삶이 비루하면 상상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을거야..화려하진 않지만 성실하고 기복없고 사람. 그 사람의 진가는 결혼 이후에 나타난다는 얘기도..그런 거..잖아.


결국 마찬가지야. 겨울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안돼도 고(GO)인거야. 인생 한 번이니까. 누군가는 돌다리도 두들기며 가는거야. 인생 한 번이니까..


그러면서 겨울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왜? 미희의 물음에 겨울은 대답했다.


엉뚱하게도 여름씨가 생각나서. 여름씨 인생은 공격이잖아. 그냥 공격도 아니고..닥공.


미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커피로 건배를 제안했다. 닥공 인생 여름을 위하여. 두 사람은 웃으며 커피를 부딪혔다.


커피로 건배를 하든, 소주를 후후 불며 마시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생은 결국 선택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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