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키스는 언제? 숙제 둘.

by 정자까야

봄이를 배웅하고 겨울은 고민했다. 저녁에 가을과의 약속이 있었다. 엄마와의 점심이 있어 일요일은 어떠냐고 물었지만 가을은 토요일 늦은 시간이라도 보길 원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집에 가서 쉬다 올지 카페에 있다 나갈지 고민하다 일단 약속 장소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겨울은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바깥 풍경을 보는게 좋았다. 길을 익히는 건 덤이었다.

오늘 약속 장소는 신촌이었다. 올해 들어 부쩍 가을은 장소 선정에 공을 들였다. 일률적이지 않으려 노력하는게 눈에 보였다. 겨울은 그런 가을의 노력이 고마웠다.

신촌에 도착했을 때 약속까지 2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카페에 있기에는 다소 긴 시간. 겨울은 오랫만에 캠퍼스를 걷고 싶었다. 졸업 후 동아리 활동으로 교정을 찾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서 캠퍼스를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교정 곳곳에 묻은 자신의 과거가 걸음걸음 되살아났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벤치에서 읽던 책, 치열했던 도서관의 밤, 그리고 열병같던 청춘까지. 이제는 보아도, 들어도 아무런 동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교정 곳곳의 추억들이 마치 어제 일인 것마냥 생생하게 살아났다. 대낮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 때였다. 잘못 들은걸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순간 설마..그러다 두번 듣는 순간 확신했다. 환청이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그의 목소리. 겨울이 한 때 매일 듣던 그 음성이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한 가정이 있었다. 아이가 캠퍼스의 잔디 위른 걷고 있었다. 엄마는 흐뭇하게 아이를 보고 있었고 아빠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아빠의 음성. 틀림없는 그였다. 겨울이 처음 정을 주었던 이성. 겨울의 엄마가 갈라놓았던 인연. 이별 후 훌쩍 군대로 떠난 사람. 여름에게 들려주었던 그 노래의 주인공.


겨울은 그와의 모든 과거와 그 과거의 흔적이 남긴 현재가 뒤죽박죽이 되어 쓰나미처럼 밀려듬을 느꼈다. 실로 두렵고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멀리서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보았다.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로 좁혀갈 수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 겨울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에 비해 자신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더 자세히 보고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이중적인 감정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그의 아이가 가는 방향으로 천천히 방향을 틀어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후에나 겨울은 움직여 인근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온 몸의 힘이 빠져 기진맥진했다. 점심을 같이 먹었던 엄마도 생각났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본 가정의 한 자리를 맡고 있었을까. 여전히 그의 목소리기 귓가에 멤돌았다. 점심으로 먹은 수제버거가 올라오는 듯한 역한 기분으로 괴로웠다. 겨울은 한동안 벤치에 몸을 맡긴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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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생각을 수습하곤 약속 시간에 맞춰 가을을 만나러 갔다. 가을은 먼저 와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서로의 일과를 간단하게 주고 받았다.

오늘 점심에 어머님과 식사하셨다구요? 가을이 물었다.

네..학교 후배 봄이 아시죠? 어머니랑 워낙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저희 엄마한테는 거의 집나간 막내 아들이에요. 봄이도 와서 셋이 같이 식사했어요.

농담을 하면서도 겨울은 엺게 웃었다. 캠퍼스에서의 혼란으로 몸에 기운이 빠져나간 듯 힘이 없었다.

봄씨가 왔었군요. 어머님과 그렇게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라니..부럽네요. 정말. 가을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네..사람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오랜 기간의 교류가 만들어낸 특권 같아요. 가끔은 자식인 저도 부러울 때가 있어요. 우습죠?

가을은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내일은 무슨 약속 있으신거에요? 오늘 늦게라도 보자고 하셔서..겨울은 가을과의 통화를 떠올리곤 물었다.

아..네. 내일도 회사 골프 모임이 있어서요.

이즘 자주 가시네요. 가을씨 운동 그렇게 즐기시는 것 같진 않은데 회사 인맥 관리 차원에서 주말도 반납하고 그리 다니시면 많이 피곤하실 것 같아요. 승진도 좋고 급여 인상도 중요하지만 쉬엄쉬엄 하셨으면 좋겠어요. 건강이 제일이잖아요.

겨울씨 말이 다 맞아요. 변명할 생각 없구요. 들어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겠죠. 거절할 땐 거절하려구요.

가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연이어 말했다.

기혼 동료들은 배우자 핑계를 대고 안오더라구요. 인원 채워야 하니 저희처럼 미혼인 직원이 또 동원이 되고..저도 겨울씨 핑계 대고 모임 거절할 날이 곧 오겠죠?

가을은 겨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겨울도 따라 웃었지만 파안대소는 아니었다.

가을씨..저 여기 오기 전에 시간이 남아 학교 갔었어요.

아..그러고보니 겨울씨 모교가 여기였죠? 어땠어요? 다닐 때랑 많이 변했겠죠?

네..낯선 곳도 좀 생기고..

그리곤 겨울이 말이 없자 가을은 기다렸다.

가을씨가 이해할거라 믿고 말할게요. 저 지금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미안해요. 넋두리일 수 있지만..가을씨가 좀 들어줬음 해요.

가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기해요. 어떤 것이든.

제가 입학한 첫 해 누군가 사귀었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일학년 때요. 친구 고등학교 선배였는데..네 그쵸? 일전에 한 번 얘기했었죠? 오늘 학교 갔다 우연히 본 거에요. 그 사람.

가을은 겨울이 무슨 얘길 할지 긴장하며 들었다.

그 사람.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어요. 벌써 아이도 한 명 있더라구요. 아이와 아내와 햇살 비추는 모교 교정에서 웃고 있는 그를 보자 왠지 제가 너무 초라해 보였어요. 그가 너무 부럽고..그의 가족 사진에 왜 나는 같이하지 못했을까.. 답도 없는 가정에 고통스러웠어요. 완전히 잊은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잊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아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이 계속 들려와 가을씨 만나기 전까지 너무 괴롭고..그렇게 만든 엄마에 대한 원망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겨울은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가을은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 겨울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그제서야 안도하며 말했다.

잊어요 겨울씨. 어찌됐든 인연이 아니었던 거에요. 어머님이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던들 겨울씨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까요?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어머니의 성화를 견디지 못했다면 겨울씨와 지내며 발생했을 다른 변수도 이겨내지 못했을 공산이 더 크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겨울씨 위로하려고 없는 말 지어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겨울은 가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었다. 특히 엄마의 개입,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으나 전쟁이 나서 생이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문과 가문이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이몽룡과 성춘향처럼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 정도 시련도 이겨낼 수 없는데 과연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전진할 수 있었을까 라는 대목에선 딱히 반박할 수가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식사 중 가을은 위안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겨울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가을의 이해와 마음씀에 고마울 뿐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나 깨달았다. 마지막 키스는 언제 했냐는 질문은 할 생각도 못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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