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비밀의 화원
일요일. 겨울은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봄이와 엄마와의 점심, 가을과의 저녁, 그리고 뜻하지 않은 첫사랑과의 조우까지..황망하고 혼란스러운 일정으로 몸도 마음도 완전히 녹초가 됐다.
점심 즈음에나 간신히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엄마는 없었다. 식탁엔 간단히 차려놓은 식사 거리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다 어제 일이 떠올라 숟가락을 놓고 머리를 감싸쥐기도 했다. 바보같이 왜 그런 일로 눈물을 보였을까. 감정의 과잉 상태일 땐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굳이 만난다면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가을씨에게 사과해야하나 추가적인 고민까지 생겨버렸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 옷을 입고 거실에 앉아본다. 푹 자고 일어나 따사로운 햇살을 마주하니 이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 매주 주말 일정을 잡을 때 가능하면 봄, 여름, 가을에게 균등한 시간을 배분하려 노력했다. 그 균등이 기계적인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가을은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으로서의 특권을 인정해서 주말 중 하루를 그에게 할애했다. 가족 모임 같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땐 나머지 요일 중 봄이나 여름과 만나곤 했다.
오늘은 당초 가을을 보기로 달력에 표시해둔 날이었다. 그게 어제로 당겨진 것이었다. 하루에 점심, 저녁 두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심신의 고갈을 부를건지는 익히 짐작이 됐기에 오늘 하루 겨울은 본인을 위해 온전히 비워두었다.
하지만 정작 심신의 에너지가 채워진 지금, 겨울은 누군가가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었다.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여름을 불러내는 게 옳은 행동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결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순신 장군 앞에서 거짓을 이야기하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아. 겨울씨 웬일이에요? 오늘 약속있다고 안했나요?
여름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네. 원래 그랬는데 어제로 당겨져서요. 부끄럽지만 제가 이제나 일어나서..혼자서 밥 먹는데 여름씨 보고 싶더라구요. 괜찮으면 차나 한 잔 하실래요? 여름씨 좋아하는 십전대보차도 좋구요.
전화기 너머로 여름의 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좋지만 날도 좋은데 좀 걸으실래요? 같이 가보고픈 코스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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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출발했기에 겨울은 여름보다 먼저 도착했다. 동대입구역 6번 출구 장충단비 앞. 장충단비의 유래를 읽고 있자니 여름이 도착했다.
겨울은 여름을 보자 웃음을 터트렸다.
백반증 환자 같아요. 썬크림을 도대체 얼마나 바른 거에요?
그대도 만만치 않은걸요. 제 썬글라스에 본인 얼굴 비치죠? 자세히 봐 보세요.
둘은 썬글라스를 쓴 부위를 빼고는 썬크림을 빼곡히 발라 파우더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통화의 말미에 여름이 좀 걸을테니 썬글라스에 썬크림 가득, 편한 복장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요? 겨울의 질문에
지금 3시쯤 됐죠? 이제부터 남산둘레길을 걸을 거에요. 여름이 대답했다.
남산둘레길이요? 저 예전에 직장 행사 있어서 걸어본적 있는데..좀 오래되긴 했어요. 겨울이 말했다.
아마..겨울씨가 알고 있는 그 길이 아닐거에요. 여름은 웃었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듯이.
네? 남산 둘레길이 하나가 아니에요?
네 일단 출발하자구요. 가면서 설명할게요.
두 사람은 장충단공원을 가로질로 리틀야구장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초등학생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3월 초인데도 벌써 시합이 한창인듯 했다.
벌써 야구 시즌인가요? 겨울이 물었다.
아뇨. 이달 말은 돼야..초등리그라 좀 일찍 할 수도 있겠네요. 저기 스탠드에 앉아 응원하는 학부모들 보이시죠? 자녀가 운동에 소질 있으면 겨울씨도 저 자리에 있을거에요.
여름은 설명하면서 앞서갔다.
전 운동 소질 없어요. 다행인건가요? 겨울이 뒤따르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마찬가지긴 한데 그게 다행인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네요. 아라를 보면 운동 잘하는 게 부럽거든요. 계단이 제법 많아 여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계단을 모두 오르니 큰 길이 나왔다. 계단만 올랐을 뿐인데 벌써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울은 벌써 감탄하고 있었다.
겨울씨. 남산 둘레길은 북측, 남측 이렇게 두 순환길이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측 순환길을 알고 있을거에요. 아스팔트가 잘 깔려있고 약간의 경사만 있을 뿐 큰 굴곡은 없는 길이에요. 산책하듯 걸으면 되는 이쁜 길이죠.
겨울은 여름의 설명을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겨울은 학생 모드가 되면 유난히 집중했다. 괜히 모범생이 아니구나 싶어 여름은 웃었다.
우리가 오늘 갈 길은 남측 순환로인데 이 길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전 개인적으로 이곳을 비밀의 화원이라 불러요. 여름은 멋적은 듯이 말했고 겨울은 자신만의 공간에 이름짓길 잘하는 빨간머리 앤 같다고 놀렸다.
왜 제가 그리 이름 붙였는지 가다보면 알 거에요. 두 사람은 큰 길을 따라 내려갔다. 황톳길이 나오고 그 끝에 세족대가 보였다. 좀 더 가다보니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름은 이곳이 북측과 남측 순환로가 만나는 지점이고 곧 데크길을 따라 남측 순환로로 진입할 것이라 일러주었다.
여름의 말대로 큰 길의 왼쪽으로 난 데크길이 있었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못보고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이후의 전개는 모르겠지만 입구는 비밀의 화윈이라 이름 붙일만 하다고 겨울은 생각했다.
앞선 여름의 뒤를 따라가면서 겨울은 점점 입이 벌어졌다. 여기가 우리가 알던 남산 둘레길이 맞나 싶었다. 아니 서울 한복판에 이런 길이 있다고? 겨울은 자신이 서울 사람이 맞았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태어나 단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이었다. 도심과 동떨어진, 차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야 나올법한 풍경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연신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다보니 어느새 야생화공원, 유아숲 체험장, 사색의 공간 등 잘 꾸며놓은 공간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사이 바위를 넘고 데크길을 걷고 울창한 나무 사이 흙길을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아스팔트 길이었다.
이 부분부턴 북측 순환로일거에요. 이길로 쭉 걸으면 다시 우리가 왔던 길로 돌아가게 되요. 남측 순환로를 걸어본 소감은요? 여름이 물었다.
경이로웠어요. 옆으로 난 작은 길을 택하자 나오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뇨..여름씨가 비밀의 화원이라길래 솔직히 약간 비웃었거든요? 겨울은 웃으며 말했고 여름도 파안대소했다.
근데 사과할게요. 100% 동의해요. 비밀의 화원. 저도 이제 그 길을 그렇게 부를게요. 멋진 길 소개해줘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겨울은 머리를 깊이 숙여 여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제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산림욕이라고 해야 하나. 남산의 숲길이 겨울의 묵은 감정을 말끔히 씻겨낸 기분이었다. 겨울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북측 순환로를 걸으며 군데군데 보이는 전망대에서 여름과 겨울은 서울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혜화동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서울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서울은 하나인데 왜 그렇게나 다른 모습일까요? 겨울은 난간에 기대 서울을 바라보며 넋두리처럼 여름에게 물었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겠죠. 동쪽에서 본 서울, 서쪽에서 본 서울, 중앙에서 본 서울..일전에 겨울씨가 일체유심조 얘기했었나요? 그런거 같아요.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안좋은 일이 있더라도 방향을 바꿔 생각해보자구요.. 달리 보일수도 있으니까요.
겨울은 고개를 돌려 여름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어제 겪었던 슬픈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해 겨울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첫사랑과의 이별 덕분에 오늘 이 자리에 이 남자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제서야 첫사랑의 행복을 축하해줄 마음의 여유가 느껴졌다. 인생이 목적지가 같은 달리기도 아닌데..왜 난 그리 못나게 굴었을까. 나도 내 행복을 찾아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데..
왠지 코 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제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겨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름은 겨울의 눈물을 보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둘은 한동안 서울과 서울 하늘을 말없이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