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7. 산정호수~열반곡
간밤에 바람이 쌩쌩 불며 추웠으므로 계곡에 얼음이 얼었을 거라 기대했는데 찰랑찰랑 맑은 물소리만 흐른다. 흔한 얼음꽃도 고드름도 하나 없다. 얼음도 쉽게 어는 게 아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만 하면 일시에 얼음 할 줄 알았건만 흐르는 물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겨울 아침, 산 능선을 간신히 비추는 햇살은 아슴한 감동을 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따뜻한 세상이 저기 어느 곳에 있을 것만 같다. 동쪽으로 걷는다. 빛 쪽으로 걸으면 눈이 부셔서 빛을 등지고 걷는 것보다 어렵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이, 비상 계엄 이후 빛 쪽으로 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다.
산정호수가 가까워져서야 작은 고드름 하나를 보았다. 산정호수는 얼어 표면이 매끈하다. 그곳을 지나는데 꾸르륵 꿀렁 이상한 소리가 난다. 뭐지?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는데 잠시 멈출 때마다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무거나 표지판이었는데 이 소리의 정체는 뭘까, 긴장하여 한참을 듣고 있었다. 아, 얼음에 갇힌 물이 내는 소리다. 물길이 막혀 뚫으려고 하는 건가. 얼음 아래서 물이 꿀렁댄다. 호수 아래 갇혀 흐르고자 하는 물이 '나 여기 살아있다'고 아우성을 친다.
백운재에 올라 고위봉으로 가려는데 백운암 이정표가 눈에 띈다. 백운암 0.7Km. 길이 있었다고? 이 길을 숱하게 다녔지만 처음 눈에 들어왔다. 저 길로 가서 원점회귀를 할 수 있나 생각해 본다. 백운암에서 천룡사지를 갔다가 열반암으로 내려가면 되겠군, 결론을 내리고 길을 바꾼다.
방향 감각 공간 감각이라고는 없는 내가 남산에서만큼은 자유롭다. 마음 내키는 대로 길을 잡을 수 있다. 이럴 수 있을 정도로 남산 이곳저곳을 자주 걸었다. 역시 자유란 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느 곳 어느 분야에서든 오랜 시간을 들여 배우고 익혀 내 것이 된 뒤에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유를 누리며 백운암으로 향한다.
드디어 빛에 닿은 것인가 싶게 길에 온통 햇살이 들어앉았다. 평지처럼 잘 닦인 좁은 길을 룰루랄라 걸어 백운암에 도착했다. 계단 아래 아마도 지팡이로 쓰라고 준비해 둔 것 같은 나무 막대기가 여러 개 있다. 하트 문양을 새겼나, 하고 보니 엽흔(잎이 떨어진 자리)이다. 생나무를 잘라 무거운데 그중 한 개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 정아(가지 끝에 달리는 겨울눈)가 달려있다. 커다란 하트 모양에 또렷한 관속흔(줄기와 잎에 물과 영양분을 전해주는 관이 있던 흔적)이 다섯 개, 무슨 나무인지 찾는 데 오래 걸렸다. 참죽나무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잎자국만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하지만 엽흔의 다양한 무늬를 보는 것은 재밌다. 웃는 아이, 원숭이, 돼지, 갓 쓴 양반, 외계인 등등 나무마다 독특한 그림을 그린다.
아담한 산사의 지붕 위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감주나무와 옥상에서 볕을 쬐고 있는 항아리에도 기분이 좋아진다. 백운암 텃밭에 곧게 쏟아지는 햇살도 좋고 소년 같은 작은 석불 입상의 미소를 마주하는 것도 좋다. 좋다, 좋다, 걸음마다 소리를 내며 가볍게 걸어 천룡사로 간다. 아무도 없는 마당 한쪽에 손바닥만 한 볕이 든 천룡사는 작고 고요하고 쓸쓸하다. 겨울 산사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계단을 콩콩 뛰어 내려간다.
천룡사지 근처에 빈집이 한 채 있다. 그 근처에 있는 부도를 이웃 블로그에서 보았다. 호젓한 부도 사진에 마음이 멈칫했었다. 언젠가 가보리라 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빈집을 지난다. 산속 빈집은 생각만으로도 오싹하지만 밝은 대낮이라 무섭지는 않다. 부도는 어디에 있을까, 빈집을 돌아 몇 발짝 걷지 않아 참선에 든 스님처럼 비스듬한 곳에 고요히 앉아있는 부도를 보았다.
아! 다시 멈칫한다. 조그마한 돌덩이, 저것이 무어라고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걸까.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것이 내 마음을 흔든 이유는 아닐 것이고 대체 무엇인지 모를 마음이다. 지금은 그저 산속에 홀로 앉아 우두커니 한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흔들린다는 것 외에 달리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다.
근처를 설렁설렁 걷는다. 아래로 길이 있어 가 본다. 줄기를 물속에 늘어뜨린 나무가 서 있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고, 그 앞에도 부도 한 기가 물을 앞에 두고 좌선에 든 스님처럼 앉아있다. 바람도 멈추었고 사방에 볕이 가득하여 따듯하다. 나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좋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평화롭고 자유롭다.
한참을 가만히 있는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때다 싶었는지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고라니가 도망을 간다. 길쭉한 다리로 덤벙덤벙 뛰어간다. 평화로운 신비가 고라니로 인해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