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4. 용장사지~이영재
여러 날 날이 추워 계곡이 얼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깡깡 얼지는 않았다. 그래도 올겨울 들어 처음 겨울바람이 만든 얼음조각을 본다.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저음의 바리톤 소리도 나고 구렁이 담 넘어가는 소리도 난다.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에서 바위로 걷는다.
그러다가 노란 나비를 본다. 날개에 갈색 주근깨가 자잘한 남방노랑나비다. 색도 흐려지지 않았고 다친 데도 없이 깨끗하다. 죽었나, 살았나, 살짝 건드려 본다. 살았다! 힘겹게 날개를 움직여 아래로 조금 이동한다. 미안해진다. 성충으로 겨울을 나나? 그렇단다, 따뜻한 겨울엔 간혹 볼 수 있다고.
지금 나비는 힘이 하나도 없다. 추울까 싶어 마른풀로 살짝 덮어준다. 그러고 나서 계곡을 벗어나 등로를 걷는데 두고 온 나비가 걱정된다. 덮어 둔 풀이 볕을 가려 오히려 추우면 어떡하지? 너무 엉성하게 덮어 추우면 어떡하지? 저렇게 작고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겨울을 나려는 거지? 털옷 입은 다람쥐도 겨울잠을 자는데, 낙엽 이불이라도 덮을 일이지. 아주 못 움직이는 것은 아니니 추우면 움직이려나? 아무래도 내려갈 때 들여다봐야겠다. 여기저기 쌓인 돌탑 위에 가끔 작은 돌을 하나씩 얹으며 나비의 안녕을 기원한다.
옷을 껴입지도 않았는데 등에 땀이 후줄근하게 덥다. 겉옷을 벗어 허리에 걸친다. 새들도 활발하다. 오늘은 오목눈이가 내내 함께 한다. 오목눈이는 드드드득 걸리는 소리를 낸다. 가끔 직박구리가 꽥 소리를 질러 나를 웃게 한다. "왜? 뭐? 어쩌라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걷다가 겉옷을 풀었더니 허리께가 축축하다. 바람이 불면 시원하여 두 팔을 활짝 벌려 바람을 맞는다. 여름 살구색 감태나무에 내린 햇살은 따뜻하고, 푸른 댓잎에 닿은 바람은 청량하다. 부지런히 걸어 용장사지로 간다. 가장 규모가 큰 전각이 있었다는 빈 절터엔 햇살만이 가득 들어앉았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올려다보이고 저 아래 들녘이 환히 보이는 절터에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힌다. 찬바람을 맞으며 걷고 싶었지만 이것도 좋다. 탑을 지나쳐 산을 더 오른다. 갈림길에서 삼화령 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의 비목나무는 봄이면 꽃이 몽글몽글 순두부처럼 피는데 역시 겨울눈이 왕성하다. 동글동글 꽃눈이 많기도 하다. 꽃눈들이 뾰족한 잎눈을 폭 둘러싸고 있다.
삼화령 연화대좌에 올라 잠시 부처 대신 연꽃잎 방석에 앉아 본다(물론 상상으로). 뿌연 하늘이지만 그래도 눈에 걸릴 것 없는 시원한 풍광이다. 낡고 허름해진 빈 연화대좌일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그냥 바위 하나 있는 것과는 다른 정취를 만들어낸다. 부처의 상은 이곳에 없어도 부처는 있어 시끄러운 속을 고요히 가라앉게 하는 것인가. 돌에 새긴 꽃잎의 형상이 이지러지고 떨어져 나간 오랜 세월, 그 시간 앞에서 사람은 숙연해지는가, 고요해지는가. 작은 산새들은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콕콕 먹이를 쫀다.
이영재에서 용장마을 쪽으로 길을 잡는다. 조릿대인지 신우대인지 모를 대나무 즐비한 길을 걷다 보면 산정호수 가는 길과 만나게 되는 길이다. 댓잎을 몇 장 따서 가방 주머니에 넣는다. 남편은 댓잎으로 돛단배를 만들 줄 안다. 아이들 어려서는 가끔 만들어 물에 띄워 주곤 했다. 돛대가 멋진 나뭇잎 배가 참 멋졌는데 만드는 법을 몰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도 그러질 못했다. 오늘은 꼭 배우리라.
용장마을이 가까워져 나비가 있던 자리를 찾는다. 어디였더라, 얼음을 처음 보았던 곳이라 그나마 어렵지 않게 찾았다. 나비는 그대로 있다. 그대로 두고 돌아선다. 어쩌다가 개입하고 말았으나 어차피 나비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돌아서기로 한다. 그래야 하는 일인 것 같다. 나비가 잘 견디기를 바랄밖에.
마을 길을 걷는데 어쩐 일로 잘생긴 딱새가 멋진 포즈를 취해주고, 박새는 백목련 가지에 앉아 마치 털옷 입은 겨울눈인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