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약함으로

2025. 1. 21. 선도산 주상절리

by 풀잎

요 며칠 '너무 오래 살았나'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권력자의 계엄령 선포보다 며칠 전 일반인의 법원 폭동 사태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또 어떤 더한 일이 벌어지려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의 한 장면. 정의를 내세우지만 자신들과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이단 종교의 하수 실행 집단 '화살촉'을 보는 것 같은 비현실성, 그런데 현실이라 한다. 이보다 더한 현실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과거에도 많았다. 세계가 언제나 진보한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힘이 들고 기운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80년 광주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고, 공중에서 분사된 최루가루에 수포가 일고 백골단에 쫓긴 기억 한 가닥 남아있지만 나는 민주화 이후 세대라 직접 목도한 세상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폭식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유가족을 조롱했던 이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폭력을 좌파 세력을 처단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이를 우리나라 파시스트의 출현이라 진단한 철학 교수는 물론 10대 아이들조차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예측하고 있으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든다.


한숨짓는 날들, 다른 세상으로 숨고 싶다. 선도산 계곡 어딘가에 주상절리가 있다 했다. 감포 읍천항에 있는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선도산 주상절리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도 가보지는 않았다. 뱀이 많다고 했다. 독사도 있다고 했다. 겨울에 가봐야지 해놓고 막상 겨울이 되면 잊었다.

고씨 재실 쪽으로 걷다가 주상절리가 있다는 계곡으로 들어선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길이 있는 줄 알아차릴 수가 없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아 좁은 계곡 사이로 주상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엽이 수북하여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스틱을 챙기길 잘했다. 물은 마르고 낙엽 수렁이 깊지는 않아 걷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첫 몇 걸음은 낙엽 아래 뱀이 있으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나약한지고.


선도산 주상절리


주상절리란 마그마가 급격히 식으면서 다각형 기둥 모양 형태로 굳어져 생긴 지형을 뜻하며 주로 해안가에서 볼 수 있다. 산의 좁은 계곡에 생긴 주상절리를 보고 나는 입을 와~ 벌린다. 장작더미를 켜켜이 쌓아 놓은 것도 같고, 올려다보면 강한 빗줄기 혹은 빛기둥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도 같다. 길에서 이토록 가까운데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 같은 신비로움에 빠져든다. 높지 않은 암석 기둥 위로는 흙이 덮이고 그 위에선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다.


좁은 계곡 머리 위로 나무들이 보인다. 그 아래 가만히 서 있는다. 동쪽 하늘에 서서히 햇살이 비치고, 나는 신생대 말기(7000~8000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암석 기둥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약해 보이는 암석이라 조심조심 걸었다. 차마 만져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약함은 나의 것이고 자연은, 세상은 나약하지 않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나의 나약함으로 함부로 부서지지 않고 오래 존속되기를 빌었다.


곧 주상절리 협곡은 끝나지만 계곡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여 나는 계곡 안으로 더 들어간다. 금방 길이 끊긴다. 미끄러운 비탈과 계곡 바위를 네 발로 기어오르다가 졸졸 흐르는 물에 무릎이 젖는다. 주상절리의 잔상 때문인지 원시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바람이 적당히 차서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계곡을 걸어 산의 정상에 이르지는 못할 것 같다. 마른 계곡 옆으로 사람이 만든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그곳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돌아본다. 감태나무가 마른 잎을 달고 줄줄이 서 있다. 바람이 살랑 불자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 사그락 들린다. 스산하지 않고 다정하게 바람이 낙엽을 밟고 지난다.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주로 다니는 두 길 사이 어디쯤일 게다. 산이 얕고 숲이 환한 겨울산이라 길을 헤맬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약초꾼이나 버섯 따러 다니는 사람들처럼 길 없는 길을 걷는다. 돌봄을 받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희미한 길 끝에는 어김없이 묘지가 있다.

사나운 어린 아까시나무 가시와 작은 새 둥지와 묘지에서 묘지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 등로에 이른다. 작은 관목을 칡덩굴이 덮은 거대한 나무의 무덤이 즐비하다. 무덤 같은 덤불숲 안에서 새들은 추위를 피해 지낼까. 새들을 무연히 보며 산을 오르다가 성모사 아래에서 돌아 내려온다.


빗줄기 형태의 주상절리



월, 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