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도

2025. 2. 2. 토함산

by 풀잎

비가 내린다. 땅에 닿는 소리도 공중에 흩어지는 소리도 없이 가만가만 내린다. 가까운 산에는 안개가 뽀얗다. 먼 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을까?

눈이 내린다는 소식은 겨우내 듣고 있지만 경주에는 아직 이렇다 할 눈이 오지 않았다. 작년 겨울 나는 산에 올라 두어 번 만났지만 몇 년째 폭폭 쌓인 눈을 본 적이 없는 아이가 말했다.

"엄마, 다음엔 나도 데려가."


산에는 눈이 내렸을까? 눈 내린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혹시나 싶어 비 그치고 산에 가자 했다. 가고 싶다던 둘째는 피곤하다며 쉬겠다고 하고 큰아이랑 둘이 간다. 토함산이 가까워지는데 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다리는 무겁고 공기는 알싸하다. 석굴암에서 토함산 정상을 오르는 짧은 거리를 둘이 낑낑대며 오른다.

그러다가 응달에 있는 희끄무레한 것을 보고 아이가,

(화들짝 좋아하며) "엄마, 눈이야, 눈!" 한다.

(심드렁하게) "그래, 눈이구나."

언제 적 눈인지 얼음 알갱이로 변한 눈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이런 것도 눈이라고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쪼그리고 앉아 눈을 뭉친다.

"그래도 뭉쳐지기는 하네."

딸 하나, 나 하나, 꼬맹이 눈사람을 만들고 떠난다. 씨익 웃는다.


멀쩡한 큰길 놔두고 성화 채화지로 올랐다가 응달져 눈이 얼어버린 미끄러운 비탈길을 내려가게 생겼다. 50m나 되려나? 그 짧은 길을 딸과 나는 "어어어 어!" 금방이라도 비탈을 데굴데굴 구를 것처럼 온갖 호들갑을 떨며 내려간다. 누가 볼까 우세스러워 후다닥 내려가고 싶지만 미~이끄럽다!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어 놓고는 내려가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큭큭큭, 이런 게 또 추억이 된다.

정상 아래에도 얼음 알갱이 밭이 조금 있다. 얼음눈 밟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내가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 열매를 보는 사이 아이는 또 얼음눈을 뭉치고 있다. 이번에는 눈고양이(아이) 하나와 눈토끼(나) 하나를 두고 떠난다. 토함산을 잘 부탁해!



산을 내려가다 등산 가방에 종을 달고 오르는 사람을 봤다. 나도 석굴암 앞 가게에서 뱀 퇴치용으로 종을 하나 샀다. 산짐승들에겐 사람을 피하라는 DNA가 새겨져 있어 소리를 들으면 피해 간다 했다.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가장 좋다지만 나는 대개 혼자 다니니까. 딸랑, 소리는 맑고 생김은 투박한 종이 마음에 쏙 든다. 딸랑딸랑, 뱜(이렇게 발음하면 뱀도 귀엽게 느껴진다나)들 잽싸게 휘리링 피해야 해.


눈에 바람맞은 우리는 거대한 풍차가 도는 풍력발전 단지 바람의 언덕에 가기로 했다. 내비에 '바람의 언덕'을 찍고 가는데 점점 멀어지더니 웬 들판의 한적한 공원에 데려다준다. 이런, 40분을 달려 화장실만 겨우 이용하고 돌아 나왔다. 우쒸, 다시 '경주 풍력발전'을 찍고 석굴암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는 바람의 언덕에 도착했다.

'노을 맛집'이라는데 한 시 무렵 도착한 우리는, 아침도 안 먹어 배고픈 우리는 풍경보다 푸드트럭에 먼저 눈이 간다. 나는 옛날 핫도그를, 아이는 회오리 핫도그와 소떡소떡을 바람을 맞으며 배부르게 먹었다. 아이가 배고프지 않다 해서 식당도 안 갔는데 잘도 먹는다.


"이곳에는 휴지통이 없어요. 다 먹고 쓰레기는 꼭 가져오세요." 주인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는데, 나무 데크 아래에 종이컵이며 휴지가 수풀 사이에 널려 있다. 몇 발짝 걷는 것도 힘든 사람들, 먹고 힘내서 뭣 하려고 그러나, 이조차 귀찮으면 먹지를 말던가. 소시지랑 같이 사람들 행태도 씹어준다.

풍경은 시원하다. 파란 물이 든 하늘에 하얀 바람개비도 시원하였지만 언덕을 따가닥따가닥 달리는 잘 생긴 두 마리 말이 더 멋졌다!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허허로운 풍경에 잘 어울리더라. 말 달리고 싶은 하늘이었다.


꼬부랑길을 다 내려와 아이에게 운전대를 넘겨줬다. 요즘 운전 연습 중이다. 나는 운전 경력이 꽤 되지만 누굴 가르칠 깜냥은 안 되는데 어쩌나 남편은 시간이 없고. 주먹에 힘 딱 주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펴가며 조수석에 앉았다. 뭘 잘 가르쳐주진 못해도 그나마 화는 안 내는 편이다. 아이는 아직 핸들을 감았다가 풀 때 불안정하지만 제법 잘한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제한속도 50, 저 앞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다.

내리막길이어서 액셀을 밟지 않아도 속력이 나는 구간이라, 53에서 "살짝 밟아주고" 했는데 외려 속도가 더 난다. "어, 어, 밟으라고!" 하는데, 점점 속도가 붙더니 65까지 치닫는다.

"밟으라고, 브레이크!"

나는 순간 '브레이크'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카메라를 지나고 말았다.

하여간에 여하간에 사이좋게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경주 바람의 언덕 풍력발전 단지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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