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0. 자옥산~도덕산
옥산서원 구인당 마루에 앉아있으면 무변루 기와지붕 위로 높지 않은 산마루가 보인다. 자옥산이다. 산자락이 도덕산으로 이어지며 두 산 마루는 쌍봉낙타처럼 보인다. 옥산서원을 드나들며 먼 빛으로 만 본 저들 산에 오르려 한다. 초행이라 블로그 글 한 편을 정독하고 나선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들머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산장식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면 된다 했는데 수풀을 헤치고 한참을 들어가도 길다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시그널 하나가 없다. 이상하여 돌아 나와 다른 쪽으로 가봐도 길이 없다. 들머리를 자세히 안내한 글을 찾아 읽는다. 식당 옆 공터에서 나는 곧장 앞으로 올랐는데 공터 안쪽 오른쪽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30분을 허비하고, 그러나 길이 아닌 길로 오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또렷이 난 산길을 걷는다. 아니, 이 산은 걷는다고 말하기 뭣하다. 초입부터 정상까지 계속 가파른 오르막이라 거의 긴다.
처음엔 가느다란 줄기의 소나무 숲이 이어졌다. 그곳엔 입산금지 현수막이 곳곳에 보이고 길을 따라 노끈을 두 줄로 쳐 놓았다. 송이 채취를 금지하려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송이의 주인은 누구일까? 현수막으로 경고만 해도 될 것을 굳이 소용도 없는 노끈으로 자연을 훼손한다. 소나무 숲이 끝나고 참나무 숲이 시작되자 볼썽사나운 노끈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랜만에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느라 여유가 없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무슨 나무가 자라나 살필 뿐이다. 크게 숨 쉴 요량으로 잠깐 선 곳에서 매미 허물을 만난다. 아주 조그맣고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을에 나오는 늦털매미 허물인 것 같다. 주인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것이어도 '살았'음을 기억하는 흔적인 것 같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갈라지고 튼, 세월의 더께가 앉은 굴참나무껍질 때문에 약간의 슬픔도 보태진다.
헐벗은 참나무 줄기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들어온다. 좋다, 하는데 오른쪽으로 가파른 능선의 도덕산이 보여 좋다 말았다. 한숨 절로 나온다. 진달래, 철쭉, 참나무, 쇠물푸레나무, 내가 아는 나무들만 보이는 것이겠지만 특별한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쪽동백나무가 많아진다. 비늘조각에 쌓이지 않은 나출된 겨울눈이 카스텔라 가루를 곱게 묻힌 인절미 같다. 두 개가 위아래로 난 세로덧눈이다. 쪽동백나무 조롱조롱 꽃 핀 모습을 상상하고 참나무 울울한 초록 숲을 그리며 걷는다. 나무를 조금 구분하면서부터 숲의 사계절을 상상해 볼 수 있어 좋다. 이 산의 봄이, 여름이 그려진다. 그러는 사이 조망이 툭 트이는 곳이 나온다.
정상 바로 아래인 것 같다. 안강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잠깐 쉬었다가 정상에 오른다. 해발 569.9m. 처음이니까 정상 인증 사진을 남기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세 갈래 길에서 도덕산으로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고 V자 형이라 오르막도 내리막도 편하지가 않다. 그나마 누가 길을 쓸어놓은 듯 낙엽이 없어 덜 미끄럽다. 조심조심 내려간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정혜사지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나는 직진하여 도덕산으로 오른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느티나무 갈라진 수피와 쇠물푸레나무보다 흐린 물푸레나무 겨울눈과 어치의 날갯짓, 이런 것들을 보는 핑계로 가끔씩 쉰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 다시 멋진 조망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아래에서 구절초 솜털 빼곡한 잎을 본다. 구절초는 가을에야 등장하는 것 같지만 구절초의 가을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제 꽃의 전생 같은 이러한 시기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연의 이면, 내면을 보는 첫걸음이기를 소망한다. 나무의 겨울눈을 살피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식물에게도 충만한 기쁨과 무상한 슬픔의 삶이 있고,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위 위에서 본 풍경은 사방팔방이 훤하다. 방금 지나온 자옥산이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멀리 언 저수지들이 하얗다. 아,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다. 목에 두른 손수건엔 땀이 찼다. 조망 바위를 내려와 조금 더 오르면 도덕산 정상(해발 702m)이다. 와우, 정상석이 세 개(어느 분이 도덕적이지 않다 하여 웃었다)나 있고 색색의 시그널이 나부끼는 화려한 정상이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서서 산과 산이 그리는 그림을 감상할 만하다. 정상에서 난 길을 이어가면 봉좌산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려와 갈림길에서 도덕암으로 내려간다. 이 길, 결코 만만치 않다.
가파르고 까칠하다. 낙엽이 수북한 곳은 늘 조심해야 한다. 스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쪽 길엔 서어나무가 보인다. 서어나무 우듬지는 홀로 봄을 맞고 있는 듯 붉다. 까치박달나무도 많다. 길이 미끄러울 때엔 나무에 의지하게 되는데 이상하게 잡고 보면 까치박달나무다. 번데기 같은 마른 잎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부부인 것 같다. 오르는 길도 힘들겠다. 내려가는 나는 다리보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천 미터 넘는 산도 허리가 아프지는 않았는데 이 산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아 허리가 다 아프다. 평탄한 길이 거의 없고 순전히 오르고 내리고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할 때에 도덕암이 나타난다. 산신각에서 보는 일출이 멋지다는 작고 소박한 암자다. 도덕암엔 도덕이라는 강아지가 있다 했다. 과연 강아지가 나를 보고 뛰어온다. "도덕아, 안녕?"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아 쇠박새가 먹이통에서 쌀톨을 집어먹는 것을 지켜보다 일어난다. 후유, 남은 길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글에서는 분명 임도를 살랑살랑 내려갔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 길은 결코 살랑살랑 걸을 길이 아니다(하아, 나만 나약한가!).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걸어가야 하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뒤로 걸으니 그나마 발가락이 아프지 않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가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내려오더니 나를 보고 선다. 도덕암 주지스님이 태워주시겠단다. 냉큼 올라탔다. 도덕이는 그 이름이 영지로 밝혀졌다(이런). 스님은 또 산들이 악산이라며 오늘의 힘든 산행을 공감해 주신다. 내리막 길이 차로도 한참이더라. 스님 덕에 편히 내려왔다. 부처님의 가피가 따로 없다. 고맙습니다, 스님! 이렇게 진심인 고마움이라니.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내려 신라시대 유일한 13층 석탑을 보았다. 국보 40호, 통일신라시대 건축물이다. 십삼층인데 삼층 석탑보다도 높지 않고 자그마하다. 오늘은 독특한 느낌만을 받고 물러난다. 여기서 차를 주차해 놓은 독락당이 지척인데 왜 이리 멀게 느껴질까. 뒤로 보이는 자옥산과 도덕산은 여전히 순한 척 능청스럽게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