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도 겨울눈처럼

2025. 2. 27. 토함산 시부거리

by 풀잎


며칠 바람이 폭신하여 겨우내 집안에 들였던 화분 몇 개를 베란다로 내보냈다. 오늘의 바람은 오렌지를 품었다. 큼지막한 오렌지 한쪽을 깨물었을 때 상큼한 과즙이 입안 가득 터질 때처럼 얼굴에 닿는 바람이 상큼하고 시원하다. 봄이 오려나 보다. 복수초가 피었을까, 성급한 노루귀가 꽃잎 열지 않았을까, 변산바람꽃은 꽃망울을 터뜨렸겠지, 기대하며 토함산 시부거리로 향한다.

날이 풀렸다고 새들 소리 왁자하다. 새들도 깃털을 부르르 털고 기지개를 쫘악 켰을 것이다. .


옷을 가볍게 입었는데도 하나도 춥지 않다. 그러나 날이 풀린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계곡의 얼음은 두텁고 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 노루귀는 아직 이르니까 그렇다 치고 복수초 한 송이 보지 못했다. 야속한지고!



계곡 건너편이 훤히 보인다. 저곳은 변산바람꽃이 피어나는 계곡 안쪽 숲이었다. 한숨을 크게 쉰다. 힌남노가 쓸고 간 계곡을 오래 정비하더니 고속도로를 뚫어 놓았다. 그래놓고 야생생물 보호구역이라며 출입 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그들도 저곳이 변산바람꽃 자생지란 것을 알았을 텐데 애초에 보호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파헤쳐지고 망가졌다. 꽃은 다시 삶을 기다리고 있을까. 바위를 초록으로 덮은 이끼의 포자낭만이 꽃을 대신해 살랑거린다.



생강나무도 올괴불나무도 아직 꽃을 내보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복수초가 무더기로 피어나는 곳도 고요하다. 성질 급한 녀석이 한두 개체는 있을만하건만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나의 꽃눈(꽃을 알아보는 눈)이 아주 어둡지는 않은데 말이다. 아마도 이렇게 고요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름날 소나기 퍼붓듯 피어날 것이다. 씨앗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다. 흙 속에서 냄새를 맡고 온도를 감지하고 햇살의 양을 측정하고 바람의 속삭임을 듣고 있을 것이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흙을 비집고 쏘옥 노루귀는 꽃대를 내밀 것이고 복수초는 꽃대 뒤로 어린잎을 틔울 것이다. 나무의 꽃눈들은 펑하고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그날은 환희로 숲이 웅성거릴 것이다. 나는 설렐 것이다. 지금은 나도 겨울눈처럼 설렘을 기다리는 중이다.



가는 줄기에 연두색 비단 주머니가 대롱대롱 걸려 있다. 오랜만에 보는 유리산누에나방의 고치다. 연두색 명주실을 뽑아 색도 곱고 형태도 멋진 집을 잘도 지었다. 앙상한 겨울 숲 여기저기 곳곳에 연두 등을 달아 놓았다. 성충 나방은 본 적이 없지만 누에나방들은 크기가 꽤 크더라. 언젠가 유리산누에나방을 만날 수 있으려나. 작은 나방 몇 마리는 벌써 활동을 시작했다.


나무의 겨울눈을 살피며 설렁설렁 걷는다. 그놈이 그놈이라 헷갈리는 중이다. 잎이 쏘옥 삐져나온 잎눈에 기뻐하는 중이다. 익숙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아하! 성격 나쁜 마녀가 도도하고도 어색하게 웃는 것 같은 소리. 가까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려 걸음을 조심조심 빨리한다. 벌써 몇 달째 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는데 모습을 보지 못해 체증을 앓는 중이었다. 오, 아, 어치다! 어치였구나, 왠지 조금은 허망하지만 체증이 내려간다. 이제 보이지 않아도 어치를 알아챌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오르막을 올라 잣나무 숲에 이르고 잣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서 정상에 오르지 않고 되돌아 내려간다. 이제 자주 토함산을 들락거릴 것이다. 내려가는 길, 잣나무 숲인 줄 알았던 숲은 탁탁탁 탁, 다다닥 닥 딱따구리 숲으로 변했다. 오색딱따구리들이 잣나무 높은 곳에서 나무를 쪼고 있다. 아래꽁지덮깃의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이 나무를 두드려대는 소리를 가만히 서 음악처럼 듣다가 걸음을 옮긴다. 산을 거의 다 내려갈 즈음에 네발나비를 본다. 노랑나비 흰나비만 봄을 맞는 줄 알았더니 성충으로 월동한 네발나비가 따뜻해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봄 날갯짓을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크기가 다른 걸로 보아 다른 녀석임이 분명하다. 꽃은 더뎌도 바람은 봄을 성큼 품었고, 숲의 생명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게도 봄은 성큼성큼 와 주겠지. 기다린다, 더욱 찬란할 봄을.



유리산누에나방 번데기
잣나무 숲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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