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0. 포항 운제산 원효암~대골
간밤에 잠을 잘 못 잤더니 무엇에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걷는 것이 가장 좋다. 아무 생각 없이 운제산으로 향하다가 왜 그곳으로 가고 있지 도중에 생각했다. 아, 청노루귀가 필 때지. 올봄 꽃이 늦어 헛걸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청노루귀가 사는 운제산은 그냥 걸어도 좋다.
오어사를 들어서니 열매를 드문드문 달고 있는 모감주나무가 보인다. 떨어진 씨앗을 찾아본다. 완두콩만 한 데다 딱딱하기가 돌덩이여서 염주로 만들 수 있겠나 싶다. 씨앗 하나를 손가락으로 굴리며 원효암으로 오른다. 매번 다리를 건너 오어지 둘레길로 길을 잡았었는데 오늘은 거꾸로 가보려 한다.
운제산은 언제라도 넉넉하고 풍성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활짝 핀 올괴불나무와 생강나무가 반갑게 나를 맞는다. 햇살 또한 넉넉한 날이라 원효암에서는 스님과 불자들이 꽃밭을 일구고 있다.
능선을 따라 산여고개 갈림길까지 갈 것이다. 급히 오른 기온 때문에 땅이 질척 질척하다. 진흙이 잔뜩 묻어 신발이 무겁다. 꽃샘추위가 지나고 얼었던 흙이 헐거워지면 싹은 그 틈에 흙을 밀어내고 고개를 내미는 걸까. 이른 봄 한 번은 오는 추위라 이른 봄꽃들도 어느 정도는 방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예측 대로 계획 대로 삶이 꾸려지진 않지만 꽃샘추위의 시련을 이겨낼 힘이 DNA에 새겨져 있을 거라고. 탄핵 선고가 늦어지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시련을 이겨낼 힘도 오천 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분명 깊게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지치려는 마음을 다잡는다.
삐이삐, 딱따구리가 내는 단조로운 소리, 날갯짓 소리와 낙엽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녹색 날개를 편 청딱따구리 두 마리가 난다. 빛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눈으로 좇는다. 나무를 콕콕 쪼고 낙엽을 들추는 새들. 다른 곳에서도 작게 부스럭 소리가 들려 보니 다람쥐도 두 마리, 낙엽 위를 구르듯이 달린다. 한참을 더 가서는 흰배지빠귀도 보았다. 지빠귀들은 가만한 명상 자세를 즐기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앉아 가만하다.
산여계곡 갈림길을 지나 두꺼비 농장 근처에서는 배와 가슴이 노란 노랑할미새도 보았다. 나를 향해 콩콩 다가오다가 휘익 날아 계곡의 물가로 내려가 물을 콕콕 쫀다. 어찌나 귀엽고 예쁜지 그저 황홀하였다. 낙엽 수북한 곳에서는 동면에서 깨어난 뿔나비와 네발나비가 날아다니는 통에 나중엔 바람에 마른 낙엽이 날리는 것을 보고도 나비인가 하였다.
사방공사를 하여 두꺼비 농장에서 대골 계곡으로 가는 길이 끊겼다. 여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고 길을 찾아 계곡으로 내려간다. 길이 편하지는 않지만 길을 모르지 않아 어찌어찌 또렷한 길에 이르렀다.
이 길의 생강나무는 꽃이 더욱 똘방하다. 진달래 꽃망울도 옅은 진달래색을 보이며 금방이라도 꽃잎을 열 것 같다. 코의 기능이 현저히 약해지는 때라 바람에 실려오는 향을 맡을 수는 없지만 가까이 코를 대면 생강나무 꽃 깊고 진한 향을 맡을 수 있다.
생강나무와 진달래를 따라 농막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버섯을 키우는 농막 주인이 농막 앞 산비탈을 청노루귀가 덮는다 했는데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몇 번을 오가며 유심히 보아도 노루귀 세 송이가 다다. 그중 청노루귀는 두 송이, 꽃잎 안쪽에 진한 보라색을 감춘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융단 같은 솜털이 반지르르하다. 어여쁘다! 주인 없는 농막 의자에 앉아 햇살을 쪼이며 쉬다 청노루귀 만날 것을 기대하며 다시 걷는다.
22년 태풍 이후 대골 계곡은 강처럼 넓어지고 물가의 나무는 쓸려나갔다. 예전에는 꿩의바람꽃이 군락을 이뤄 피던 곳도 폐사지처럼 쓸쓸해졌다. 쓰러진 나무와 마른풀들과 뽑혀 흉측해진 나무뿌리가 즐비하다. 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옛 영화(榮華)를 그리듯 꽃자리를 톺아보다 쓸쓸함만 더해진다.
모퉁이를 돌듯 구부러져 돌아간 길에서 누렇게 변한 변산바람꽃을 보았다. 예전에도 한두 송이는 보았지만 아직 싱그러운 꽃까지 제법 있는 변산아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요기조기 변산아씨다. 지고 있는 중이어서 이제 막 수정되었을 뾰족한 열매도 볼 수 있었다. 마른 꽃잎에 털북숭이 애벌레가 앉아 있다. 애벌레도 열매도 또 다른 생을 준비하는 중일 것이다.
계곡을 건넌다. 올해 첫 제비꽃은 흰색 꽃잎이 앙증맞은 남산제비꽃이다. 먹이 달라 보채는 아기 새 주둥이처럼 귀엽다. 오는 동안 싹만 보아 서운했던 현호색도 활짝 피어 노래를 부른다. 현호색은 오선지 위를 날며 노래 부르는 음표 같다. 현호색은 나의 꽃 지표식물이기도 하다. 현호색 피어있는 곳엔 다른 들꽃도 있다. 곧 청노루귀가 보일 것이다. 드디어 청색 노루귀를 알현한다.
꽃이 늦는 건지 세가 약해진 건지 예전만 못하나 피어있는 꽃은 당당하고 아름답다. 가는 줄기가 휘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자태도 우아하다. 꽃쟁이들 서너 명이 있다. 너무 많이 찍어도 찰칵찰칵 소리를 꽃들이 싫어한다며 금방 자리를 뜨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께서 꽃을 보며 헤벌쭉한 나를 보고 '예쁩니까?' 묻기에 기쁨을 가득 담아 '예쁘네요', 했다. 예쁘다.
나는 꽃을 찍는 사람들이 꽃의 예쁜 한 때만 보지 말고 꽃의 전 생을 보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엎드려 찍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꽃들 사이를 걸을 때면 아무리 조심해도 나도 모르는 새 밟을 것이다. 낙엽 아래 삐죽 올라오는 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엎드리지는 말았으면 싶은 것이다. 야생의 꽃이라 생명력이 강해 밟혀도 죽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는데 아니다, 밟히면 죽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꽃이 다 사라지고 사진만 남으면 좋을까?
계곡을 한 번 더 건너면 그곳에도 노루귀들 노니는 작은 터가 있다. 이곳에도 서너 명이 무릎을 꿇고 꽃을 대하고 있다. 꽃이 하도 작아 아무도 관심 기울이지 않는 꽃 앞에 나도 앉는다. 하필 그렇게 옹송거리고 있는 꽃을 찍냐 묻기에 나는 또 '예쁘네요', 했다. 예쁘다. 피는 꽃도. 지는 꽃도. 누가 보아도 예쁜 꽃도. 누가 보아도 덜 예쁜 꽃도. 다 예쁘고 소중하다. 그래서 누가 치워 놓은 것 같은 낙엽 이불을 살짝 덮어주었다.
복수초도 노란 햇살 다발처럼 한밭 가득 피었다.
계곡을 나와 오른쪽으로 새로 난 오어지 둘레길을 걸었다. 길이 갈치꼬랑지처럼 길고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