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 늠비봉오층석탑~포석정
가고 싶은 길이 많아 갈등이 이는 계절이다. 여러 길을 상상 속에서 걷다가 집을 나서기 전에 갑자기 길을 바꿨다. 부흥사 벚꽃을 보았으면 싶었다. 지금 벚꽃이야 흥청망청 다 쓰고 죽지 못할 만큼, 제비가 물어다 준 흥부네 박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물처럼 흐드러지고 흐벅지고 흘러넘치는 것이지만, 그것은 왠지 딴 세상의 것 같아 나는 나만의 꽃을 찾아 나선다.
가는 길에도 온통 벚꽃 물결이다. 어쩌면 이렇게 일시에 꽃망울을 터뜨리는지, 놀랍고도 황홀한 폭죽이다. 그러나 벚나무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거리의 느티나무 이파리도 어느새 오지게 자라 푸슬푸슬 더펄더펄하다. 이맘때의 느티나무 잎은 촉촉하게 물먹어 반짝반짝 말캉한 연두와 연갈색 잎의 향연을 펼치는데 그보다 조금 더 자라 더벅머리 아이처럼 장난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삼불사에서 작은 못을 지나 지마왕릉으로 가는 동안 새소리 분주하다. 바가지 박박 긁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명랑하고, 삐삐삐삐삐 이것은 동고비가 내는 소리다. 경계음인가, 소리가 크고 단조롭다. 같은 소리가 빨라지면 휘잇 휘잇으로도 들린다. 음정과 박자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동고비, 음치인 내가 이럴 때 생각하는 말은 에밀리 디킨슨의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다. 석양을 보고 선 캥거루를 생각하면 에밀리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고 웃음이 나며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캥거루가 어때서, 이런 반항 한 꼬집 뿌려 버무리는 마음.
지마왕릉 솔숲은 시끌벅적하다. 까치와 직박구리처럼 째지는 소리를 내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덤 앞 잔디 위에 있던 새무리가 우르르르 날아올라 높은 곳으로만 다닌다. 밀화부리인가, 새를 알아보겠다고 능 주위를 탑돌이 하듯 돈다. 언제나 새들의 승리, 뿔뿔이 흩어지고 높은 소나무 가지에 남은 두 마리 새를 바라보다 목만 뻐근하게 아프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 밀화부리가 맞다면 맑고 고운 소리는 구애할 때만 내나 보다. 시끌시끌한 숲을 벗어난다.
얼마 걷지도 않아 다시 발목이 잡힌다. 이번에는 어두운 청람색, 날아다니는 무언가다. 어지러이 날다 마른 풀잎에 앉는다. 녹슨 철대문 색을 가진 것이 나비다. 생김은 부전나비. 한동안 가만히 있어주었는데 하도 작아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고 숨까지 멈추어도 사진의 초점을 맞추는 데는 실패했다. 팔랑 사라져 버렸다.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쇠빛부전나비를 찾아보니 쇳빛부전나비로 알려준다. 어찌나 아쉽던지 발은 계속 움직이는데 나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로 걷는다. 힐링마을엔 수선화, 동백, 살구, 청유채… 등등이 난만하다. 탱자나무 하얗고 동근 꽃망울이 예쁘다. 아직 산에 들어서지도 못한 나는 서두른다.
진달래 피어있는 길을 걷는다. 물소리 졸졸, 살짝 찬 바람이 걷기에 좋다. 내려오던 중년의 남자가 인사한다. 산에 아무도 없어 무서워 도중에 내려오는 길이란다. 미안하지만 큭큭 웃었다. 이 나무 저 나무 눈으로만 간섭하며 빨리 걷는다고 걸어도 나는 늦다. 아까 그 사람이 두 동무를 얻어 나를 앞질러 간다. '산이 빡센데' 이런 말이 들린다. '가장 편안한 길 중 하나인데 저 남자들 뭐지?' 그래도 나보다 빠르다. 또 나만 캥거루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다시 나비를 보았다. 쇳빛부전나비, 녹슨 쇳빛이 나는 왜 이리 좋을까. 놓치고 다시 보이고 그러나 또 멀어지다가 부흥사 근처 계곡에 이르러서야 여러 마리를 만났다. 나비들이 바위 위에 앉는다. 발소리를 죽여 가만가만 다가간다. 이곳에서는 많이 까칠하지 않다. 뱅뱅 주변에서만 논다. 나도 오늘은 이곳에서 놀기로 한다. 가방을 벗어놓고 따뜻한 물을 마시며 쉰다. 나비가 가까이에 내려앉는다. 마음껏 양껏 본다.
진달래에 산란하고 번데기로 동면한다 하니 이제 갓 우화 한 나비일 것이다. 색은 어두워도 이른 봄에 나와 봄의 전령으로 불린단다. 날아다닐 때는 어두운 푸른빛이 얼핏 보이지만 끝내 날개를 펼쳐주지는 않는다. 접은 날개는 적갈색 암갈색 녹갈색이 섞여 있고 안쪽으로 갈수록 까만 어둠에 가깝게 짙어진다. 털 부숭한 몸과 날개 테두리 쪽은 하얀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희끗하다. 바위에만 앉다가 마른 줄기에도 내려앉고 두 마리 나비 섞이며 춤도 추길래 짝짓기를 응원했지만 아직 그럴 마음은 없나 보다. 떨어져 각자 내려앉는다. 아까의 아쉬움은 사라지고 나는 충족되었다. 작은 나비 하나가 오늘 나의 하루를 기쁨으로 꽉 채운다. 작은 세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신비로운 마법은 그러나, 마음이 하는 일이겠지.
부흥사를 지나 늠비봉에 오른다. 그곳에서는 진달래꽃꿀을 먹는 나비를 보고 내려가는 임도에서는 내 근처에서 노는 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잠깐 앉았다 가는 기쁨을 선사한다. 손바닥이 간질간질, 이 몇 초의 행복은 여러 날 문득문득 찾아올 것이다.
늠비봉에서 내려와 부흥사 안으로 들어간다. 꽃이 몽글몽글, 왕벚나무구나. 나의 상상에서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박새 쇠박새 노랑턱멧새 동고비들이 노래하는 숲이라 좋다. 나무껍질 날리는 곳을 올려다보면 동고비가 있다. 이 길은 앞으로 '새소리길'이라 이름 지을까 보다. 늠비봉 석탑이 바라보이는 곳에 섰다가 임도로 내려간다.
벚나무를 공부할까 하여 벚나무마다 살피지만 봐도 모르겠다. 거리의 나무는 대게 꽃이 탐스럽고 꽃이 먼저 피는 (일본)왕벚나무다. 자생종 제주왕벚나무가 있지만 가로수로 식재한 나무는 일본왕벚이 대부분이라는 것. 자생 왕벚은 이름조차 빼앗겨 앞에 제주를 붙여야 한다. 그냥 왕벚은 일본산이 차지했다.
산 주변에 야생으로 피어 잎과 꽃이 같이 나는데 털이 없으면 벚나무, 많으면 잔털벚나무란다. 산벚은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고, 올벚은 꽃이 먼저 피고 특히 꽃받침 통이 크게 부푼다는데 보지 못했다. 왕벚나무의 황홀함에도 마음을 빼앗기지만 나는 잎과 함께 하늘하늘 피는 벚꽃을 참 좋아한다.
산 아래에선 흰나비와 푸른부전나비가 희고 푸른빛으로 화안한 봄을 팔랑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