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2025. 4. 4. 칠불암~틈수골

by 풀잎

탄핵 심판 선고의 날, 긴장이 되긴 해도 선고일이 지정된 후론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지 외려 내겐 사람을 믿는 구석이 있다.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불안을 감당하고 나는 홀로임을 감당한다. 제법 공평한 것 같다. 그렇지 아니한가.

여하튼 어디에서 결정의 순간을 맞을까 생각하다가 산에 가기로 했다. 칠불암 위 높은 바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파면 선고의 주문을 듣게 되면 '이 아니 좋지 아니한가' 싶은 것이다.


칠불암에서 백운암, 천룡사지, 와룡사, 틈수골로 길을 잡았기에 버스로 이동한다. 갈아타고 기다리고 하느라 텀이 길어져 시간이 빠듯해진다. 그래도 놓칠 수 없는 풍경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근처 연못(양피지)에도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가느다란 연 줄기가 만든 기하학적 풍경이다. 겨울의 빼곡하던 줄기도 거의 다 스러지고 얼마 남지 않은 줄기가 흥성대는 봄의 와중에 고요와 여백의 미로 침묵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위로 떨어진 느티나무 그림자에 든 연둣빛만으로도 봄은 충만하다. 넘치는 봄만 봄이 아니고… 변변찮은 생각을 끊어내는 것이 있다.

첨벙, 자라인가. 수련 잎 동동 뜬 아래에서 헤엄을 친다. 암수인지 엄마와 새끼인지 작은 놈이 큰 놈 뒤를 따라간다. 그 녀석들 외에도 여기저기 꽤 많다, 얼굴을 빼꼼 내민 녀석도 있다. 공터 정원에는 보송보송한 털을 두른 할미꽃이 싱싱한 아름다움으로 노래하고 그 뒤엔 돌단풍이 하얀 꽃을 피웠다. 봄이 흥성된다. 이제 나는 전력질주하여 칠불암으로 오른다. 도중에 쇳빛부전나비 한 마리 보았다.


양피지의 봄


헉헉대며 칠불암에 오르니 11시 7분 전이다. 만장일치 인용의 마음을 담아 부처께 합장하여 인사하고 서둘러 바위를 오른다. 결정문을 듣는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이 사건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고". 옳고 아름다운 결정문 낭독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단어 "파면한다"로 끝을 맺는다.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다.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 "파면한다"를 소리 없이 외친다. 바람이 시원하다.


가족과 친구와 이 기쁨을 톡으로 나눈 후 다시 걷는다. 올라올 때 무릎이 살짝 뻐근했는데 이리 가벼울 수가 없다. 활짝 피어난 진달래한테도 알려준다. "파면이래." 나는 진달래에게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산불 진화, 산림 정책 등 정치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완전무결 훌륭한 정치인은 없지만 다시는 국민 주권을 우습게 아는 자를 우리의 대표자로 뽑아서는 안 될 일이다. 폴짝폴짝 걸음마다 기쁨이 넘치는데 단풍나무 새순도 화답하여 손가락 하트를 날려준다. 사랑해, 모든 게 사랑으로 보이는 날이다.


단풍나무 새순


백운암으로 가는 길의 진달래도 마음을 환하게 한다. 천룡사로 가는 길엔 노랑제비꽃 피어 나고, 보고 싶던 산자고는 이제 막 봉오리 맺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밥때에 밥집이 가까워지니 밥 생각이 난다. 귀룽나무 꽃도 볼(아직 안 폈더라) 겸 녹원정사에 가 밥 하나 달라 해서 먹는다. 따끈한 숭늉이 맛있다. 이 집 밥은 매번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게 된다. 시원한 신선주도 한 잔. 캬, 좋다. 흐하하, 나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게지. 아, 그런데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1인분 상을 2인분 상으로 차려주는 주인도 문제다. 짜구가 난 것 같다. 뒤뚱뒤뚱 천룡사터를 산책한다. 살구꽃 지고 자두나무 꽃이 환하다.


부른 배를 내밀고 산을 내려간다. 분꽃나무 꽃망울은 붉어지고 다릅나무 은회색 잎엔 광택이 일고 거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고 연보라 왜제비꽃은 봄비에 새순 돋듯 우르르 피었다. 와룡사를 지나며 본 너도밤나무 잎은 반 접은 채로 있는 모습이 뭔지 모르게 얄상스런 데가 있다. 그러나 되바라진 느낌이 밉지 않고 예쁘기만 하다.


틈수골 아랫마을은 항상 내게 삭막하였는데 매번 갑자기 튀어나와 짖던 개도 이젠 늙어 잠만 자는 나른한 봄날 오후라 그런지 오늘은 다정하다. 지는 갈색 목련도 아름답고, 마늘 심긴 밭 흙담 위로 배꽃 핀 담장도 예쁘다. 가시 사나운 음나무 아래 담장을 부드럽게 물들인 분홍 명자꽃도, 낡은 담장 아래 말끔한 장독과 빨래집게 줄줄이 걸린 검은 빨랫줄이 보이는 어느 집 마당도 정겹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덜커덕 자주 멈추는 버스 때문에 멀미가 나 혼났다. 저녁엔 파티를 하자는 딸이 먹고 싶다는 찜닭을 먹으며 오늘을 조촐히 축하하였다. 몸무게가 또 늘었다. 그래도 좋다. 민주 시민의 역량으로 회복될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다.


명자나무 꽃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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