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1. 선도산
봄이 늦던 우리 집 베란다에도 군자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사월의 봄을 알린다. 봄 기념으로 묵은 잎 떼고 위치도 조금씩 바꿔준다. 나는 어젯밤 '아직 젊은데 일을 하지 그러냐'는 블로그 이웃님의 댓글을 생각한다. 베란다에서 하던 생각이 산길로 이어진다. 오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해할 무엇도 없어 오해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게 오랜 숙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정리했다 생각하지만 완전히 해결되진 않아서 가끔 나쁜 꿈도 꾼다.
나는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능력이 없어 버는 돈과 일하며 쓰는 돈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에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그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철저한 분업을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돈을 벌어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작년에 큰아이가 대학에 가자 진짜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나 싶어 잠깐 일을 알아보다 돈 씀에 큰 차이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먹고사는데 큰 문제없고 저축은 없지만 빚도 없고 적은 금액이지만 꾸준히 기부도 하고 가끔 내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도 한다. 그럼 됐다 싶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산과 책은 돈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다가 넉넉하지 못함이 슬플 때도 있다. 가령 뮤지컬을 보고 싶은데 가족이 다 보려면 엄두가 안 날 때 누구라도 안 보고 싶다 하면 속으로 좋아할 때 슬프다. 그 정도다. 내가 일을 안 한다고 당장에 문제 될 것은 없다. 닥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기에 생활력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공주로 살아오진 않았다. 노후에도 적게 먹으며 가난하게 살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말할수록 궁색하고 옹색하다. 그래도 다시 정리하고 나니 좀 가뿐하다. 그러는 동안 정상에 올랐다.
마을 입구 카페에 만첩조팝나무 꽃이 신부의 꽃다발처럼 사랑스럽게 피어 있었다. 어느 집 담장 위론 미색 꽃이 피어있다. 저것은 납매인데, 납매는 겨울에 피는 꽃인데 4월에도 쌩쌩할 수 있나, 의심하고 보아도 납매다. 꽃이 깨끗하다. 이야, 납매를 다 보다니 운이 좋다. 서양산딸나무 꽃은 해바라기 하느라 뒤태만 보여준다. 벌써?라는 생각이 드는데 올해 봄의 시계가 뒤죽박죽이라 필 때 되어 피는 꽃도 벌써인지 적당한 때인지 자주 혼란스럽다. 집집마다 꽃밭인 이 마을을 걷는 건 그러나 언제라도 좋다.
보희연못 쪽으로 오른다. 왜가리가 소리도 없이 훌쩍 날아 건너편에 내린다. 내가 새에게 다가갈 때처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걷다가 한 곳을 오래 응시한다. 나는 그런 왜가리를 지켜본다. 오, 갑자기 부리를 연못 속으로 찌른다. 어라, 물고기 잡은 줄 알았는데 해묵은 식물 줄기다. 민망했나, 다시 소리 없이 날아오른다. 큰 새의 날갯짓이 더 고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새들은 날아오를 때 날갯짓 소리가 부산하다. 사람도 그런 것 같다.
나비가 날고 새소리가 들린다. 완연한 봄인 것이 나비가 다양해졌고 번식기를 맞아 참새도 고운 소리를 낸다. 짙은 향기 풍겨온다. 유난히 하얀 분꽃나무 꽃이 아기 배냇저고리 해 입히면 좋을 것 같은 포근함으로 피었다. 흠뻑 들이켠 향이 짙다. 찌든 피로와 걱정도 날려줄 것 같다. 좋다. 무덤가에는 온갖 꽃들이 핀다. 제비꽃, 큰구슬붕이, 각시붓꽃, 어머나, 푸른 아기별 반디지치도 있다.
참나무는 새잎 날 때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형광 노랑에 가까운 연두 잎은 신갈, 붉고 털 많고 물결진 잎은 떡갈, 길쭉한데 끝이 둥근 잎은 굴참, 뾰족한 잎은 상수리, 잘고 털 많아 흐린 녹색 잎은 졸참, 눈앞에 있는 갈참은 특징을 모르겠다. 주렁주렁 수꽃을 매달았다. 손으로 쓱 만지니 노란 꽃가루가 묻어난다. 털어도 잘 안 털어진다. 바지에 닦았더니 바지도 노래진다. 꽃가루알레르기를 일으킨다며 소나무한테만 뭐라 할 일이 아니었다.
이 산에는 유난히 고사리가 많다. 고사리를 좋아하지 않아 매번 그냥 지나쳤는데 생산적인 일을 해볼까 하여 고사리를 끊는다. 똑똑 연한 줄기가 잘 끊긴다. 재밌다. 나뭇가지에 긁히며 한 줌 끊었다. 삶으면 한 접시 나올까. 음식 잘하는 아는 언니 줄 생각이다. 통통하니 이뻐 흐뭇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자주 나비를 보았다. 다가올 듯 멀어지며 나를 골렸는데 짙은 색 나비는 끝내 제대로 보지 못했고 호랑나비는 정상을 지나서 해후했다. 족도리풀 피는 봄에만 볼 수 있다는 애호랑나비인 줄 알았는데 노란 색감이 진한 산호랑나비다. 그러고 보니 이 산에서 족도리풀을 본 적이 없다. 어야든동 날개 활짝 펼친 나비 보아 기쁘다. 짝을 만나 춤추며 멀어진다.
성모사에서 잠깐 쉬었다가 내려간다. 개별꽃, 배꽃, 모과나무 꽃, 복사꽃 피었다. 고사리 끊으러 들어간 무덤가엔 봄맞이, 조개나물, 제비꿀도 피었다. 예쁘다 생각 안 해 심드렁했던 조개나물도 오랜만에 보니 화들짝 반갑다. 고사리를 다시 한 줌 끊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다.
도봉서당 뒤편 언덕엔 다시 작약이 심어지고 전에 없이 보희연못 둔덕까지 넓혀 심었는데 내 작약꽃 좋아하나 이럴 일인가 싶다. 그 둔덕은 작은 들꽃들이 함부로 자라났던 곳이다. 이는 사람의 눈요기를 위해 생명 다양성을 파괴하는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꽃도 나무도 다 경제의 논리로만 대한다. 그러다가 망할 날 올 것이다.
마을 골목길 따라 큰봄까치꽃이 푸른 별로 빛난다. 한 송이 진 꽃이 통꽃이라 작은 구멍이 뽕 나 있다. 하얀 별꽃도 함께 있다.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이러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다가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언젠가 마당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때엔 텃밭 일구며 더욱 가난하게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오늘 볕이 뜨거워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